가마솥에 뜸들인 눈물<2>-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입력 2015-10-09 01:00:06

중공군에 겹겹이 포위된 셋째 형, 7일간 나무 매달려 목숨 건져

7. 셋째 형 6'25전쟁 참전기

셋째 형은 나와 열아홉 살 나이 차이가 났다. 나를 막냇동생이라고 해서 앉혀 두고 먼저 겪은 6'25전쟁 이야기를 어린 나에게 전해 주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에서 전쟁을 도발하자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시기에 셋째 형은 남자답게 국가가 부를 것을 미리 알고 큰형, 둘째 형, 종형 등 누구보다 먼저 자원입대하였다. 적성에 따라 육군 공병부대에 편성되어 부산 곁인 김해에서 특과교육을 받고 전방에 투입되었다.(중략)

셋째 형은 대한민국 육군 공병부대에 근무하였다. 아울러 전공을 세우기 위하여 제일 선봉부대에 편성되어 피비린내나는 전투현장에 투입되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개월이 지나면서 9월 초가 시작되었다. 전 세계 16개국 우방군과 의료진까지 지원되었고, 무기지원과 병력동원으로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포악 무도한 공산군을 무찌르게 되었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고착된 전황을 단숨에 뒤집는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월미도부터 점령한 미군은 이어서 인천에 상륙하여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했다. 상륙 초반 북한은 기습을 당했던 터라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 해병대가 내륙으로 진격해 가면서 이들의 저항도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6'25전사에서 살펴보면 인천 상륙작전은 미1해병사단이 주 공격군이 되었다. 여기에 한국 해병대 1개 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가 합세해서 상륙했다. 뒤이어 육군 7사단이 뒤따른 상륙작전으로 전위함대는 약 40척의 함선이었지만 후속하는 보급선까지 합치면 250여 척의 대부대였다.

1950년 10월 26일 셋째 형은 한국군 6사단 청성부대 7연대 선봉부대로 압록강 초산진에 최초로 도착해 수통에 물을 채웠다.(중략)

기쁨도 순간, 하늘이 시샘을 하였나? 호사다마였나? 다음 날 사단장 김×오로부터 짧은 전문이 왔다. "귀 연대는 위험에 처했음. 휴대할 수 있는 무기만 가지고 알아서 잘 철수하기 바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전문이었다.

조국의 통일이 눈앞에 보였는데 이 무슨 해괴한 전문이던가? 이 전문을 받은 부대에 속한 셋째 형은 앞이 캄캄하게 되었다. 한국군 6사단 7연대의 퇴로를 열기 위해 가던 2연대가 중공군 38군, 40군, 39군의 병력에 겹겹이 포위된 것을 확인하였다. 사단장은 청성부대를 포기한 것이었다. 장개석 300만군을 유린한 중공군 3개 군단(중국군 편제는 1개 군이 1개 군단 병력임, 15만 명 추산)에 포위된 청성부대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셋째 형이 속한 단위 부대는 전투에 임했지만, 인해전술로 다가오는 중공군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밤낮으로 퍼부어 대는 중공군의 따발총 소리에 포위되어 후퇴도 못 하였다. 전우들이 죽어나갔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오직 동료와 둘만이 소나무 위로 높이 올라갔다. 푸른 소나무 잎이 카키색을 위장하여 주었다. 낮이고 밤이고 중공군이 물밀듯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10월 말 찬바람이 불어서 나무 밑으로 중공군이 지나가고 동료가 죽어간 자리만 남았다. 건빵도 없었고, 수통에 물도 다 떨어지고 없었다. 꼭 일주일간 나무에 매달려 죽지 못해 생명만 건진 것이었다. 물, 물이 없었다. 입술이 부르트다 말라서 붙어 버렸다. 아,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구나를 느꼈다.

11월 1일, 마침내 중공군 개입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한바탕 전장을 치른 곳의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골짜기 맑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빨리 물을 먹어야 산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먹고 싶은 물이 바로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기어가서 물을 실컷 마셨다.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 그것은 맑은 물이 아니었다. 같이 싸우던 전우가 죽은 핏물의 도랑물이었다. 살기 위해서 마신 물이 죽은 전우 시체의 핏물이었다. 동료의 핏물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다른 생각도 못 하고 밤을 이용하여 후퇴로를 찾아서 도망하였다.(중략)

8. 특무상사 이덕숙

셋째 형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 대한민국 육군에서 미군부대로 전역했다. 그곳에서 양심적 근무로 인하여 승승장구 계급이 진급하여 누구나 부러워하는 특무상사까지 승진했다. 특무상사라는 계급은 당시 하사관에서는 최고의 계급장이었다.

셋째 형은 휴가를 나올 때 특무상사 계급장을 가득히 안고 나왔다. 군복 정장에 달린 계급장은 모자, 양 어깨, 오른쪽 가슴에 달렸다. 붉은색 계급장으로 통도배한 정장을 입고 왔다.

큰형도 군에 입대하였지만 제주도 군 훈련장에서 병장을 달고 제대하였고, 둘째 형도 강원도 속초에 근무하면서 병장으로 제대하였다. 셋째 형은 일자무학이면서 어찌 하사관 최고 계급인 특무상사로 진급하게 되었는가? 대한민국 육군도 아니고 미군부대로 전역하여 특무상사까지 달고 다녔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린 눈에 정장에 달린 모자, 양 어깨, 가슴의 붉은 계급장이 휘황찬란하게 보였다. 정장을 벗으면 평복에도 계급장이 수두룩하게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자랑스러웠다.

휴가를 올 때는 M1 소총을 항상 휴대한 채 왔다. 늠름하고도 믿음직스러운 셋째 형이었다.(중략)

9. 엄마의 편두통

엄마는 자식을 많이 낳았고, 산후도 산후이지만 가장 못 견뎌하는 것이 편두통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민간요법으로 산비둘기를 잡아 고아 먹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두통은 사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병으로 일반적으로 한쪽 머리가 아프면 편두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편두통은 연령 및 성별에 따라 유병률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주로 젊은 성인 여성에게서 많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셋째 형은 휴가 나올 때 무시무시한 M1 소총을 직접 메고 나왔다. 엄마가 편두통을 호소하면 알았다는 듯 겁도 없이 총 들고 앞산으로 산비둘기 잡는다고 나갔다. 우리도 하도 신기하여 따라나섰다.

앞산으로 뒤따라 올라가자 산비둘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조준을 하고 산비둘기를 향하여 격발을 하였다. 천지가 내려앉는 소리로 기억한다. 산골짜기마다 소리가 공명되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엄마 편두통약으로 쓸 산비둘기를 잡아서 내려왔다. 무려 세 마리나 잡았다. 1957년 사회가 불안할 때라 총소리를 듣고 지서에서 경찰 두 명이 나왔다. 산 아래에서 기다렸다.

"총을 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 접니다."

"총을 왜 소지하였으며, 사격을 한 사유를 말하시오."

"예. 저는 미군입니다. 총 소지증 여기 있습니다. 산비둘기를 약에 쓰려고 잡았습니다."

"앞으로는 총을 함부로 쏘지 말기 바랍니다."

시골에 경찰이 찾아왔으니 간이 콩알만 해졌다. 당당히 총 소지증을 내보이는 셋째 형이 더 늠름하게 보였다. 현역군인 정복을 입고 특무상사로 온통 붉은 계급장이 어깨며, 모자며, 가슴에 달려 있어서 더 자신만만해 하였다. 셋째 형이 대단해 보였다.

잡은 산비둘기는 뜨거운 물에 튀김을 당하고, 털이 뽑혀서 고이 가마솥 속으로 들어가 편두통 약이 되고 말았다. 정말 신기한 것은 엄마가 산비둘기를 고아 먹고는 그 후에 낫게 되었다. 그날부터 편두통이 사라졌다. 정말 민간요법이 통했는가? 다 나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중략)

12. 문맹 퇴치하는 동사(洞事)마을

(중략)

동네 반장이었던 셋째 형이 사전에 교육대상자 조사를 하여 문맹자들이 모여들었다. 한글을 못 읽는 분이 자그마치 남녀 삼십여 명이었다. 동사에 남폿불을 켜서 불을 밝혀 두고 낮에 일하던 어른들이 밤에 공부를 한답시고 동사에 나왔다. 그곳에는 셋째 형도 앉아 있었다.(중략)

자모를 먼저 배우도록 하였다. 먼저, 자음으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자까지 모두 7자를 가르쳤다. 읽는 법부터 가르치고, 나중에 쓰는 법을 익히도록 했다. 대다수 낮에 일을 많이 하여서 지쳐 그저 졸고 계셨다. 내가 맡은 것은 열심히 가르쳐 드려야 했다.

이튿날이었다. 자음 나머지 글자인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자를 가르쳤다. 다음은 모음으로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모두 10자이다. 오늘 배울 것을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음에는 쓰기를 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자음과 모음을 합하여야 한다. ㄱ에 ㅏ 하면 '가' 하고, 가에 ㄱ 하면 '각' 한다. 각 글자 밑에 그림이 있었다. 그렇게 글자와 그림을 유추하도록 교재가 짜여 있었다. 소설 상록수에서 채영신이 한글을 가르치던 것이 생각났다.

가로, 세로줄을 치고, 모음 10자와 자음 14자를 합하여서 글자를 만들면 140자 낱글자를 익히도록 하는 한글 도표가 되었다.

이 표는 가로로 읽어서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로 배웠다. 또 세로로 읽어서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이렇게 가로 세로로 왕복 읽고 쓰고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제정한 후로 우리 국민이면 배워서 알아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배운 것으로 글자를 깨치기에 셋째 형은 너무 부족하였다.(중략)

제2부 자수성가

14. 셋째 형의 혜안

미 육군부대에 편성되어 3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였어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아니하고 군 입대 7년 만에 동료의 사고로 인하여 특무상사에서 강등되어 대한민국 육군하사로 전역되었고, 마침내 예편하여 기다리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1957년 겨울 제대를 하고 오랜만에 시골 초당에 앉아 있으니 답답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답답한 시골 초당이 아니라 군대이지만 여지껏 여러 군데를 다녀 보았다. 사람이 전쟁터에서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보전하는지, 상대방을 피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방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활한 것이 아무래도 초당 머슴들과 일하기에는 답답하였을 것이었다.(중략)

경주군에서 가장 가까운 도회지가 피란지 부산이었다. 표를 끊어 손에 들고 묵묵히 차창의 바깥 풍경을 응시하였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불국사-죽동-입실-모화-병영-울산역을 지나치면서 한편으로는 겁도 났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4년째 되는 해 1957년, 누구나 먹고살기에 급급한 도회지 풍경을 스케치하러 간다는 것이 어쩐지 역발상이었다. 셋째 형은 개의치 아니하였다. 사람 살기가 어렵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움을 누가 더 잘 극복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참에 도회지 사람들의 삶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새로운 삶을 위해 틈새를 파고들어 가야 하는 것에 피 끓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사는 방법에서 그 해결의 장을 찾으려는 의도를 셋째 형은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산은 전쟁으로 인하여 매우 부산스러웠다. 하루에 두 번 끄떡 들어 올리는 영도다리에서 푸른 바닷물을 들여다보았다. 동래 범어사를 향하는데 온천장 곁 미남이라는 곳이 미나리꽝으로 덮여 있었다. 추후 발전되면 배후지로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일주일간 부산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도 자꾸 동래 미남의 미나리꽝이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밥상 하나를 사들고 왔다.

아버지 앞에 꿇어 엎드려 경천동지할 제안을 하였다. "제가 전쟁터에도 갔다 오면서 깨우친 것이 있어서 이 밥상을 놓고 제안 하나를 말씀 올리겠습니다."

"여행은 잘했나? 그런데 이 밥상은 뭐~ 꼬?"

"밥상은 세상입니다. 제가 촌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사람들과도 살아 보았고, 이 밥상에 밥을 잘 놓아 먹으려면 현재 이곳을 떠나야 할 겁니다."

"조상 산소는 누가 관리하고,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어디로 간단 말이고?"

"예. 부산에 다녀왔는데, 요즘은 한적한 곳이지만 앞으로 가장 발전할 곳이 동래 미남입디다. 논 팔아서 미나리꽝만 사면 앞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야가! 뭐라 카노? 조상 산소 내버리고, 이 많은 네 동생들 다 도시로 데리고 간다고? 네 큰집은? 작은집은 우짤라고? 미나리꽝 사자고? 허허허…. 일 낼 아이네."

"아버지가 안 된다 카믄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둘러본 결과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앞으로 사람들에게 땅이 필요할 것이고, 땅이 곧 돈이 늘 수 있는 수단이라서, 많은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서 제안한 것뿐입니다."

셋째 형은 이러한 혜안(慧眼)을 가지고 아버지께 제안한 것인데 아버지 철학과 맞지 아니하였다. 소가 열한 마리요, 머슴이 셋이요, 논이 일흔여 마지기였다. 밭이 사천여 평이고 선산이 구천여 평인 재산으로 부산으로 갔으면 모두가 사는 방법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셋째 형은 분명 혜안을 가진 것이었다.

그 후 동래 미남리의 지가(地價)는 호가를 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부산광역시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발전할 자리가 바로 미나리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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