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철 야생동물과의 전쟁…경북 농작물 3년간 46억 피해

입력 2015-10-06 01:00:08

◆야생동물 피해 농가 사례

◇고구마밭 전기울타리 훌쩍

#추석을 지나 농산물 수확이 한창이라 기분이 들떠 있어야 하지만 봉화군 소천면에 사는 김인호(70) 씨는 요즘 머리가 아프다. 하루가 멀다고 출몰하는 멧돼지와 고라니가 수확기에 접어든 고구마와 채소 등 농작물을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지원으로 전기울타리 시설까지 설치했지만 무용지물. 울타리 안으로 뛰어넘어오는 고라니는 막을 길이 없다. 김 씨는 "고기가 귀할 때는 포수들이 멧돼지나 고라니의 흔적만 봐도 쫓아가서 모조리 잡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서 "집중 포획 등 정부가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벼 훑어 먹고 논둑 파헤쳐

#의성군 이모(73) 씨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요즘 들녘을 볼 때마다 울화통이 치민다. 밤마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논바닥을 엉망으로 만드는 멧돼지 때문이다. 멧돼지들은 벼를 훑어 먹거나 쓰러뜨리는데 그치지 않았다. 논둑까지 마구 파헤치고 농기계 출입로까지 끊어놨다. 이 씨는 "멧돼지가 싫어한다는 흰색 천조각을 논 가장자리 여러 곳에 꽂아뒀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며 "그나마 성한 벼는 지켜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경북 도내 곳곳에서 멧돼지, 고라니 등 야생동물과의 한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수확철을 맞아 그동안 애지중지 길렀던 농작물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보금자리가 줄면서 먹이까지 없어진 야생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

특히 도내에서 최근 3년간 야생동물에 의한 농작물 피해규모가 46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정부와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실효성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멧돼지 30억·고라니 9억 까지 2억 '냠냠'

◆급증하는 농작물 피해

5일 경북도에 따르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3년간 도내에서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이 모두 46억4천2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규모 중 멧돼지에 의한 농작물 피해액이 30억8천900만원(전체의 66.5%)으로 가장 많았으며, 고라니가 9억1천800만원(19.8%), 까치 2억6천800만원(5.8%), 청설모 6천400만원(1.4%) 등의 순이었다.

문제는 농작물 피해를 끼치는 주범인 주요 야생동물들의 개체 수가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것. 국립생물자원관이 최근 발표한 '2014년 야생동물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북도내 야생동물 서식밀도는 멧돼지 경우, 2012년 100㏊당 1.0마리였던 것이 2013년 0.8마리로 줄었다가 지난해 2.8마리로 급증했다.

고라니도 2012년 100㏊당 6.6마리였지만 2013년 7.6마리, 2014년 8.4마리로 증가 추세다. 까치도 2012년 100㏊당 7.1마리에서 지난해 11.0마리로 크게 뛰었다.

경북도는 야생동물로부터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51억3천만원을 쏟아부었다. 전기목책기, 철선울타리, 방조망 등 피해예방시설을 지원하는 한편, 야생동물 포획에 적극 나서고 있다.

경북도 김준근 환경정책과장은 "최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가 점점 사라지면서 먹을거리가 없어지는 데다 개체 수가 급증, 농가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대학가·아파트 지하주차장 '어슬렁'

◆대도시에도 출몰하는 야생동물

지난달 13일 오후 11시쯤 대구 달서구 신당동의 한 대학캠퍼스에서 멧돼지 두 마리가 나타났다.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사살했고, 다른 한 마리는 인근 와룡산으로 도주했다. 이에 앞선 지난해 9월 15일에는 대구 남구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발견됐다. 아파트 경비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은 멧돼지를 사살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아파트 경비원이 멧돼지에 팔, 엉덩이 등을 물려 부상을 입는 등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대도시도 가을철 먹을거리가 찾아 도심으로 내려오는 야생동물 때문에 더는 안전지역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최근 생태계 파괴로 서식지가 훼손되고 먹이가 부족해지는 데다, 겨울철 교미기간을 앞둔 시기에는 성질이 더욱 난폭해질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5일 대구소방안전본부에 따르면 멧돼지 신고로 출동한 건수는 2012년 42건, 2013년 37건, 지난해 36건을 기록했다. 특히 올 들어 지난달까지 집계된 출동 건수는 50건가량으로 지난해 한 해 출동건수를 훌쩍 넘겼다.

◇道, 올해부터 4개 권역별 순환수렵장 '탕탕'

◆야생동물 포획에 적극 나서야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자 경북도는 올해부터 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눠 권역별 순환수렵장을 운영하기로 했다.

다음 달 20일부터 내년 2월 29일까지 경북 북부권 6개 시'군(영주'봉화'안동'예천'문경'청송)에 순환수렵장을 운영한다. 6개 시'군은 엽사(獵師)들에게 멧돼지 사냥을 허용하고 무분별한 포획이 아닌 개체 수 조절을 목적으로 한 수렵장을 운영하기로 했다.

봉화군 관계자는 "4년 만에 수렵장을 개설하는 만큼 수렵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고 예방에 철저함을 기하겠다"고 했다.

대구시내 각 구청도 멧돼지 포획에 뛰어들었다. 서구청은 이달 말까지 사냥개를 이용한 상시 유해조수기동포획단을 구성해 와룡산 일대 야생 멧돼지 포획에 나선다. 또 인명피해를 막고자 멧돼지가 출몰하면 야간 산행 금지하는 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남구청 역시 기동포획단을 구성해 멧돼지 출몰 신고가 들어오면 즉시 출동할 태세를 마련했다. 동구청은 지난 8월부터 11월까지 멧돼지 출몰 주의보를 내리고 멧돼지 포획단을 구성했다.

대구소방본부 관계자는 "멧돼지에게 등을 보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말고 주위의 높은 나무 위나 바위 등으로 신속히 피해야 한다"며 "119, 112, 지자체 등에 신고해 추가 피해를 막는 것도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이런 가운데 피해 농민들은 집중포획을 통해 야생동물 증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봉화군 명호면에서 농사를 짓는 박태섭(67) 씨는 "파종기부터 수확기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모조리 잡든지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면서 "농작물 피해발생 시 최대 500만원 한도 내에서 보상해주는 제도가 있지만 피해 면적이 일정 면적을 넘어야 하고, 전기울타리 등 피해 방지시설을 설치할 때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면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기준이 까다로워 보상받기가 쉽잖다"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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