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와 함께 떠나는 중남미 여행,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
중남미의 볼리비아와 과테말라 대사를 지낸 김홍락(63) 씨. 퇴직 후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문경시 가은읍의 한 폐교를 구입, 지난해 '잉카마야박물관'을 열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국내서 보기 드문 잉카마야박물관을 연 이유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1979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2011년 퇴직할 때까지 30년 넘는 외교관 생활 가운데 20년을 중남미에서 보냈다. 그가 일했던 곳만 해도 칠레, 멕시코, 파나마, 볼리비아, 과테말라 등 8개국에 이른다.
중남미에 근무할 때 조금씩 모았던 유물과 생활 자료들이 2천여 점. 은퇴하자 그것들을 모아 잉카마야문명의 매력을 알리는 박물관을 열었고, 지금은 중남미 여행 가이드를 꿈꾸고 있다. 김 전 대사는 중남미를 닮은 맑고 아름다운 문경에서의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했다.
-문경에 정착한 이유가 궁금하다.
▶퇴직한 후 박물관을 짓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중에서 문경이 경치가 가장 좋았고 관광객이 많아 최적지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문경이지만 '길'과의 인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됐다.
-'길'과의 무슨 인연인가.
▶옛길의 이끌림이다. 박물관 정문에 커다랗게 쓰인 것이 바로 '카미노 레알'(Camino Real)이다. 고대 잉카제국의 옛길이다. 잉카문명의 후예인 인디언이 만든 이 길은 남미 안데스 산맥을 따라 잉카제국의 수도 페루를 거쳐 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를 잇는 장장 5천㎞에 달하는 도로망이다. 해발 5천m 이상의 고원지대를 통과한다. 문경 역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2012년 문경에서 열린 옛길 전시회에 잉카마야의 길을 소개하면서 문경과 좋은 인연이 시작됐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그 길 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박물관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안내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남미 인디언들은 어떠한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길을 만들었다. 그들은 바위산을 만나면 터널을 뚫고 가파른 절벽이 나오면 계단을 만들고 계곡과 계곡은 줄다리를 연결했다. 그 길을 통해 그들은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고 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처럼 나도 길 없는 길을 만들면서 인생 후반을 화려하게 꽃피우고 싶다.
-박물관 준비 과정을 이야기해 달라.
▶2013년 이곳 폐교를 구입할 당시 학교는 온통 쓰레기장이었고 마당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1년 동안 쓰레기를 치우고 교실의 옛 모습을 살리는 데 갖은 애를 썼다. 지난해 박물관을 개관할 때 허리둘레가 무려 10㎝나 줄었다. 저절로 몸짱이 되었다.(웃음) 지금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하고 있다. 내년쯤 돼야 원하는 모습이 될 것 같다.
-왜 이런 고생을 하는가.
▶딸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난리다. 노년에 연금 받으며 아파트에서의 편안한 삶을 팽개치고 노후자금과 퇴직금을 다 털어 부으면서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볼멘소리다.
-힘들게 박물관을 열어야 할 이유가 있었나.
▶20년 동안 중남미에서 살며 그들의 삶과 생활을 이해하고 좋아하면서 그곳의 유물을 하나씩 모으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창고가 가득 찼다. 어떤 물건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은퇴하고 나니 매년 수백만원의 창고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도 무리였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했던 박물관의 꿈을 실현하기로 했다. 박물관을 열어 중남미 문화를 알리고 민간인 차원에서 우호친선을 해야겠다고 아내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기대 이상인가.
▶3천원의 관람료를 받고 있는데 깎아달라는 사람, 그냥 구경하자는 사람도 있다. 관람료로는 전기료 등 유지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잉카마야문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새롭게 알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신이 난다.(그는 관람객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설명하고 있었다.)
-부인이 박물관 관장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나는 중남미문화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고 아내가 박물관 관장이다. 박물관을 만들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아내였고 유물을 구입하기 시작한 것도 아내여서 관장 자격이 넘친다(웃음). 아내의 싹수를 잘 키워 노후가 즐거운 셈이다.
-중남미에서만 오랫동안 근무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어릴 때부터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외교관이라면 영어는 물론 세상의 모든 언어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는 고급인 편이고 중국어 일본어도 조금 한다. 외무고시를 볼 때 스페인어를 선택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인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남미로 첫 발령을 받았다. 칠레의 3등 서기관 부영사였다. 그 후 스페인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이 중남미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게 된 이유인 것 같다.
-결국은 스페인어가 당신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외교부에서는 험지에 가면 다음번에는 선진국으로 보내주는 그런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속이 조금 쓰렸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당신의 동기 중에 제일 먼저 대사가 됐다.
▶2003년 외무고시 동기 가운데 처음으로 과테말라 대사 겸 온두라스 겸임대사로 발령을 받았다. 현지 경험이 많은 중남미 전문가를 찾던 참여정부의 인사정책 덕분이었다. 인생이 그렇더라. 조금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득으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이었다.
-그래서 은퇴 후 더 멋진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미국이나 유럽에 오래 있었으면 이런 멋진 박물관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중남미 생활을 하다 보니 생활비가 적게 들었고 그런 이유로 그곳의 유물이나 생활용품을 조금씩 구입할 수 있었다. 인생은 반드시 좋은 것도, 반드시 나쁜 것도 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땐 섭섭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지금의 생활을 누리게 한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이 멋지다.
▶중남미에서 혼자 모든 걸 개척하다 보니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그런 별명을 지었다. 명예도 출세도 좋지만 어디에 가든 밀알이 되고 벽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했다.
-외로운 늑대의 심정으로 '체 게바라의 일기'를 번역했나?
▶2008년 볼리비아 대사를 할 때 그곳 외무장관으로부터 처음으로 공개된 체 게바라의 일기 사본을 받았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죽기 직전의 일기였다. 실물과 똑같은 복사본이었는데 일기에 있는 담배 자국을 보면서 그의 생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평생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섰던 그의 삶이 마음에 들어 한번 번역해 보고 싶었다. 현직 외교관이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의 일기를 번역해 책을 냈다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철저하게 메모를 했고 죽음을 넘나드는 그 순간에도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의 일기를 번역한 후 나도 메모와 일기를 쓰는 버릇을 가지게 됐다.
-외교인상도 받았다.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다. 외교인상을 받은 이유도 음지에서 고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관이 화려해 보이지만 오지에서 고생하는 이들도 많다.
-외교관이면서 일본과 중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 가까이 있으니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본과 중국을 아직도 가보지 못했다.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곧 현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
-볼리비아 대사 시절 한글과 관련해 그곳 언론의 엄청난 조명을 받았다.
▶볼리비아는 36개 인디언 부족으로 된 다민족국가이다. 이 가운데 아이마라 인디언 부족이 250만 명으로 케추아족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이들은 말만 있지 문자가 없다. 스페인어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기했는데 정확한 발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글 표기로 하면 어떨까 싶어 매주 주말이면 그들을 찾아가 아이마라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을 직접 가르쳤다. 한 아이에게 한글을 1시간 가르쳤더니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기초 아이마라 한글교본도 손수 만들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다른 부족, 더 나아가 중남미 전역 인디언의 한글화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한글의 훌륭함을 몸소 체험했겠다.
▶그렇다. 막연하게 한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볼리비아 대사에서 물러나면서 교육도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서울대학교에 이러한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해 주었는데 더욱 구체적인 결실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직도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나.
▶라틴어와 중국어를 독학하고 있다. 서양과 동양의 가장 오래된 글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라틴어는 그 속에 그 단어의 원래 뜻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단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요즈음의 일상을 알려 달라.
▶새벽 5시에 일어나 중국어 라틴어 공부를 하고 박물관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있다. 밤에는 TV를 볼 틈도 없이 8시면 잠이 든다. 남미 오지에서의 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험난한 남미의 경험이 여기서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정식 전문 박물관으로 등록하려고 한다. 지방정부로부터 지원받을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사재를 털어 박물관을 만들었고 또 운영하고 있다.
-꿈이 있다면.
▶중남미 여행 가이드를 하고 싶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중남미 여행' 멋지지 않은가? 국내서도 중남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중남미에 대해 나만큼 속속들이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잉카마야문명을 설명하는 가이드를 하면 멋지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도 스페인어를 잘하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박물관 관람객이 적은 겨울, 중남미 여행 가이드를 하고 싶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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