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꿰뚫고 있는 하나의 가치를 말하라면 나는 '공평함'을 꼽겠다. 하느님이 인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을 가톨릭에서는 '공의'라고 표현하는데, 공의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다. 그 누구라도 신 앞에서 똑같은 잣대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에도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이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 순간 종교와 법을 찾는 이유는 바로 '공평함'에 있을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3포 세대'(취업, 결혼, 출산 포기)라 불렀다. 취업이 안 되니 결혼을 포기하고, 배우자가 없으니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라는 뜻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 세 가지만 포기하면 '그럭저럭' 생활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88만원 세대'란 말도 등장했다. 암울하고 고단한 우리 청년들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신조어였다.
그런데 어느새 이 두 표현은 언론 지상에서, 또 우리의 대화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헬 조선'이다. '헬'(hell, 지옥) 같은 대한민국 땅에 더는 희망이 없다는 섬뜩한 표현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떠나고 싶다는 탈출의 선언이기도 하다. '3포'를 해서라도, 88만원을 받고라도 아등바등 대한민국에서 살고자 했던 청년들이 백기 투항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헬 조선, 지옥불 반도가 뭔지 아느냐?" 지난 15일 기획재정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야당 의원이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몰아붙였다. 최 부총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진정 몰랐던 것인지, 알면서도 책임 추궁을 피하려 그렇게 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국민행복시대'를 만들겠다고 공약하고 지지를 읍소했던 정치 지도자가 최 부총리이다. 한반도에서 더는 희망을 볼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 무능함이요, 듣고도 모른 체한다면 무책임이다.
'헬 조선'이라는 용어에는 애초 반정부를 선동하는 정치적 프레임이 내포돼 있었다. 박근혜정부에서 못살겠으니 정권 한 번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차 그 의미는 퇴색되고 오히려 팍팍한 청년의 삶, 보이지 않는 희망, 자포자기 등 이런 국민적 분노로 변화했다. 이렇게 의미를 진화시킨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정치권이다. 국회의원의 자식이 아니면 취업하기 어려운 세상, 자식은 아니어도 국회의원 인턴이라도 해야 취업이 되는 세상, 마약을 일삼고도 유력인의 가족이면 집행유예로 버젓이 교도소 담장을 걸어 나오는 세상, 고관대작들이 민생과 무관한 권력투쟁과 정치 보복에만 몰두하고 있는 세상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일들이 어떤 국민적 감정을 불러일으켰을까? 선거로 꼭 심판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을까? 그런 감정이 들었다면 아직 헬 조선은 아닐 것이다. 변화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지난 17일 이뤄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만여 명의 응답자 가운데 90%, 특히 20~40대 가운데 88%가 '한국이 싫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물음에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게 또 현실이다. '헬 조선'을 '헤븐(heaven, 천국) 조선'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도 결국 정치인이다. 성경을 관통하는 '공의'의 개념, 헌법이 정의하고 있는 '평등'을 다시 나라의 중심에 세울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인물들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들이 과연 바뀔지, 또 바꿀 수 있는 인물들이 대거 내년 4월 국회에 들어올지는 미지수이다. 경험칙으로는 회의적이다. 그렇지만 더는 지옥에서 살 수 없지 않겠나. 훌훌 털고 떠나지 못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겠나. 다시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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