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 산책]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낙천성

입력 2015-09-26 02:00:01

여지를 먹는 맛에-소식

나부산 아래쪽엔 사시사철 봄날이라

노귤과 양매가 차례대로 새로 익네

날마다 여지를 삼백 개씩 먹고 보니

영남 땅 귀양살이도 마다할 일 아니로세

羅浮山下四時春(나부산하사시춘)

盧橘楊梅次第新(노귤양매차제신)

日啖荔支三百顆(일담여지삼백과)

不辭長作嶺南人(불사장작영남인)

*원제: [食荔支(식여지)-여지를 먹다]

*노귤(비파), 양매, 여지: 모두 열대지방에서 나는 과일. *나부산: 작자가 유배살이 하던 혜주(惠州) 부근에 있는 산. *영남: 혜주가 있는 오령(五嶺) 이남 지역.

이 시를 지은 소식(蘇軾, 1036~1101)은 66세의 늙은 나이에야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다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 같고/ 이 내 몸은 묶지 않아 떠다니는 배이로다/ 평생동안 했던 일을 나에게 묻는다면/ 황주 혜주 담주에서 귀양살이 한 일일세(心似已灰之木/ 身如不繫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儋州)." 보다시피 그는 자신의 일생을 귀양살이 하나로 요약하고 있다. 지나치게 재주가 뛰어난데다, 번번이 권력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운 데서 야기된 아주 당연한 결과이다.

위의 시도 소식이 급제 동기의 모함을 받고, 머나먼 영남 땅 혜주로 귀양 가서 지은 시다. 혜주는 무더위와 풍토병 때문에 견디기가 정말 쉽지 않은 곳. 하지만 그곳은 사시사철 날씨가 따뜻하여 각종 과일들이 풍성하게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과일들 중에서도 소식은 특히 천하절색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여지'를 매우 좋아했던 모양이다. 날마다 여지를 300개씩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귀양살이하는 것도 마다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 여지나 실컷 먹으면서 귀양살이를 오래도록 하고 싶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나는 총명 탓에 내 생애를 다 망쳤네/ 바라건대 이 아이는 둔하고 어리석어/ 별 탈 없이 높은 벼슬하게 되었으면(人皆養子望聰明/ 我被聰明誤一生/ 惟願孩兒愚且魯/ 無災無難到公卿)." 소식이 갓 태어난 아들의 복을 빌며 '장난삼아' 지었다는 시다. 장난삼아 지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아들이 둔하고 어리석기를 기원하는 마음의 이면에는 귀양으로 얼룩진 삶의 비애가 물큰 묻어 있음이 확실하다. 그런 소식이 여지를 먹기 위해 귀양살이를 오래도록 하고 싶어 했을 리야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해학과 익살을 부리면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줄 아는' 작자의 낙천과 여유를 본다. 머피의 상황을 셸리의 상황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 그 지혜지수가 바로 인생의 행복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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