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의 '오감도'에는 13인의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가 공존한다. 누가 무서운 아이일까. 옆에 있는 이 아이일까. 혹은 나를 제외한 모두일까. 어쩌면 13인의 세상 모두가 나를 두렵게 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지만, 공포의 근원은 알 길이 없다. 이쯤 되면 누가 무서운 아이인지 선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서운 아이는 공포를 확산시킨다는 제 역할을 다하고 만족스러워 할 터다.
시의 세상에서 벗어나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무서운 아이에 대한 공포는 현실까지 이어진다. 치열한 현실에서 살아가며 자신을 공격할 이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웃도 나를 밟고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칠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따뜻한 인간애를 바라지 마라. 이렇게 신뢰는 무너지고, 파스빈더의 영화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잠식된 영혼이 느끼는 공포를 현실에 맞춰 수치화해보자. 우리나라가 뒤집어쓴 멍에,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20대 사망원인 중 자살이 첫 번째란 사실쯤 되지 않을까. 좀 더 와 닿는 사례를 찾는다면 21일 서울 여의도 증권가 한복판에서 30대 여성이 15층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이런 죽음이 안타까워 혀를 차지만, 선택의 어리석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자살을 선택한 이들의 나약한 정신 말고 이 죽음에 관여한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타지를 품고 산다. 20대 대학생은 학업을 마무리 짓고 화려한 세상에서 멋진 인생을 살아보려는 욕망이 판타지를 만든다. 그리고 이 판타지는 자신이 누릴 미래를 포장한다. 고소득 직장, 섹시한 스포츠카, 멋진 연인 혹은 배우자. 하지만 현실은 막다른 골목이다. 취업의 압박은 목을 조르고, 학자금 대출이나 내 집 마련을 위한 빚은 자신을 궁지로 내몬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꼈을 때, 공백을 메우고자 판타지는 주인을 채찍질한다. 살아남으라고. 좀 더 치열하게 자신을 불태우라고.
세상에 '무서운 아이'가 존재한다면, 치열한 경쟁을 위해 공포를 조장하는 세상 그 자체가 아닐까. 개인이 가진 판타지를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최고만을 선별해 세상을 움직이려 하는 이 구조는 판타지를 위해 '낙오하면 죽는다'는 공포를 심어 놓는다. 누가 자신을 공격하고 패배자 낙인을 찍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감. 이 불확실성은 공포를 더욱 키운다. 세상은 마치 골목길에서 도망 다니는 13인의 아이를 지켜보는 '오감도'의 까마귀 같다. 공포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마지막 희망인양 뚫린 골목길로 뛰쳐 간다. 그 끝에 있는 건 낭떠러지다. 한발 더 내딛기를 망설이는 '무서워하는 아이'의 등을 떠미는 손. 그 손이 진짜 살인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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