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면 必亡國" 조선, 다산의 개혁 외침 새겨들었다면…
약 열흘 전 어느 신문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이 실렸다. 선생의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 다섯 폭을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에게 보냈고, 이 옷을 받은 선생이 이를 잘라 서첩으로 만든 후 여기에 인생의 교훈을 담아 두 아들에게 전했다는 바로 그 문건이다.
이 서첩이 이런저런 사유로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귀한 보물을 어느 개인이 사서 넣어두면 되겠느냐? 국민모금이라도 해서 우리 모두의 것으로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이 신문 글의 내용이었다. 글을 쓴 이는 바로 박석무 이사장. 선생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그대로 묻어난 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 글 덕분인지 다행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를 사 들여 은 국민의 재산이 되었다.
다산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를 근 50년. 민주화운동을 하며 옥고를 치르고, 국회의원을 두 차례나 하면서도 그는 다산 선생을 놓지 않았다. 선생 관련 책을 10권 이상 썼고, 선생을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되게 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며 피를 토하듯 말했던 선생, 그런 선생의 이야기를 박 이사장으로부터 듣는다. 그때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남을 중앙일보 사옥 J빌딩 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김병준: 다산 선생 연구를 오랫동안 해 오셨다. 얼마나 되셨나?
박석무: 대학원생 때인 1970년부터이니까 46년 되었다.
김병준: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박석무: 출발은 한문 때문이다. 집안이 유림 집안이라 어릴 적부터 한문을 공부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저녁에는 다시 서당에 나가 공부를 했다. 자연히 유학이나 한문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로부터 한문 박사라는 말을 듣게 되고 대학 진학 이후에도 교수님들이 한문과 관련한 무엇이 있으면 내게 맡기곤 했다.
김병준: 유학이나 한문을 잘 안다고 꼭 다산 선생을 연구하는 건 아니지 않나?
박석무: 그렇다. 직접적인 계기는 대학원 시절 교수님 한 분의 조언이다. 고문서들을 읽을 수 있으니 조선법제사 연구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관련 문헌을 찾아보는데 미개척 분야라 뭐가 없었다. 그러다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의 동경대학 박사 학위 논문인 를 읽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다산 선생의 경세유표 연구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편집자 주: 아사미 린타로는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절 통감부의 법률고문을 지낸 일본 변호사다. 방대한 양의 우리나라 고문서들을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가 죽자 그의 자손은 이를 미국인들에게 팔아넘겼고, 이렇게 해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 문서는 현재 버클리 대학의 에 소장되어 있다.
김병준: 다산 선생을 처음 읽을 때의 기분이 어땠나?
박석무: 읽으면 읽을수록 좋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시대정신과도 잘 맞았다. 그래서 1971년에 이라는 이름으로 논문을 썼다.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러나 데모를 한 경력이 있어 대학에 남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갔는데 거기서 또 구속이 되었다. 1년 3개월을 감옥에 있었는데, 거기서 뭘 하겠나. 왕조실록도 보고 다산 선생 책을 읽었다.
김병준: 다산 선생이 귀양 가서 쓴 책을 감옥에 있으면서 읽으신 셈이다. 묘한 인연이다.
박석무: 정말 그렇게 되었다. 선생의 책은 번역본이 없어 원서로 읽었다. 그러다 보니 더 깊게, 더 많은 생각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김병준: 선생이 남긴 저서가 얼마나 되나? 수백 권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정도의 저술이 정말 가능하나?
박석무: 당시는 한 권이 통상 40~50쪽 정도로 되어 있다. 한자 1글자가 한글 3글자 정도 되니 40~50쪽이면 지금으로는 130쪽 정도 되는 셈이다. 또 글자 크기 등을 생각하면 약 3권이면 요즘 책 1권이 된다. 책이 최소한 500권은 넘으니 지금의 권수로 계산해도 상당하다. 방대한 분량이다.
김병준: 주로 어떤 분야가 많나?
박석무: 제일 많은 부분은 역시 유교경전 연구이다. 모두 231권이나 된다. 국가 경영에 관한 책도 많다. 관리들의 행동지침을 담은 목민심서, 제도개혁의 내용을 담은 경세유표, 재판에 관한 흠흠신서 등이다. 여기에다 기계와 농기구를 연구하고, 지리와 의학 등도 공부했다.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대었는데 손을 댄 분야는 모두 최고 수준까지 올라갔다.
김병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분 같다. 어떻게 그렇게 넓고 깊이 공부할 수 있었을까?
박석무: 기본적으로 백성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관심을 가졌다. 지리와 역사를 알아야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공부했고, 백성이 먹고살기 편해야 하니까 농기구를 연구하고 거중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부지런한 메모광이었다. 어디든 갔다 오면 반드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수많은 여행기와 관람기가 있다.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었다.
김병준: 공부를 하자면 책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그 긴 귀양살이에 책은 어떻게 구했나?
박석무: 가족들을 포함해 여기저기서 보내 주었다. 그리고 귀양지 강진 근처에 요즘 말로 하면 국립중앙도서관보다 더 좋은 도서관이 있었다.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종택. 바로 선생의 외가였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가 윤두서 선생이고, 윤두서 선생의 손녀가 다산의 어머니였다. 당시 이 윤씨 집안처럼 책을 많이 가진 집안은 없었다.
김병준: 다산 선생은 당시, 즉 19세기 전후의 조선이 지극히 위태롭다고 느낀 것 같다.
박석무: 사실 그래서 개혁을 주창한 것이다. 경세유표 서문에서 선생은 나라가 사람으로 치면 "터럭 하나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오늘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필망국(必亡國),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나 조선이 없어졌다.
김병준: 정말 피를 토하듯 나라 걱정을 쏟아 내었다. 그런 분이 국가 경영에 참여하지 못한 채 18년이나 귀양 생활을 했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박석무: 그때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인물들에게 뭘 씌워 가지고 내모는 것은 똑같다. 조봉암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처형시킨 것 등…. 복권을 시켰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러면 뭐 하나. 정약용 선생의 경우 출신이 남인이다. 주류인 노론들과도 적지 않은 교류를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들은 선생의 벼슬이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선생의 개혁정신을 경계했다. 그래서 천주교도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을 천주교도로 몰아붙인다. 귀양 갈 때의 나이가 40세, 귀양이 풀렸을 때가 57세였다.
김병준: 스스로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기울어지기만 하는 나라를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박석무: 그래서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스스로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했다. 기다릴 사(俟)에 암자 암(菴)이다. 무슨 말이냐, 글을 남겨놓고 후대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뒤에 오는 세상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것이다. 자신이 한 학문이나 개혁안에 대해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김병준: 다산 선생 이전에도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 선각자들이 많았다. 율곡 이이 선생이 그랬고 성호 이익 선생이 그랬다. 이들이 세력화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박석무: 당시는 왕조다. 어떻게 세력화될 수 있겠나. 불가능하다.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역모와 반역의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병준: 바로 이 부분이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실 그때 왕정은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바꿀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버티다 결국 일본 손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 역시 막부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이 따로 있는 일본에서는 세력화된 개혁집단이 막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바로 명치유신이다.
박석무: 우리는 왕정이었다. 상소로 임금을 비판하는 것만 해도 괜찮은 임금은 용인하지만 고약한 임금의 경우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세력화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지만, 시대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병준: 다산 선생이 국민의 저항권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박석무: 다산정신의 하이라이트다. 국민 저항권을 통째로 인정했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 선생이 황해도 곡산 군수로 부임할 때 갑자기 이계심이라는 민란의 수괴가 나타났다. 주변에서 그를 체포하려 하자 선생이 이를 말린 후 그가 내민 탄원서를 읽어 나갔다. 전임 군수가 먹을 양식을 다 빼앗아갔으니 난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난을 일으켰음에도 그를 풀어주었다.
김병준: 저항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했다는 말 아닌가?
박석무: 다산 선생이 말했다. "목민관이 밝지 못한 것은 백성들이 뒷일을 걱정해 관(官)에 항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두려움 없이 옳은 주장을 했다. 천금을 주고 사야 할 사람이지 벌을 줄 사람이 아니다."
김병준: 더욱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정조 치세가 좀 오래갔으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박석무: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가정이 어떻게 성립하겠나. 오히려 다산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실천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이를테면 선생이 가장 경계했던 것이 신분차별, 지역차별이다. 오늘날 어떠냐? 다 해결되었나? 경상도가 어떻고 전라도가 어떻고 그러고 있지 않나.
김병준: 선생의 개방정신이나 개혁정신도 제대로 실천이 되지 않고 있다.
박석무: 경세유표를 왜 지었느냐? 오래된 나라를 개혁하고, 그래서 리메이크하자는 뜻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정권마다 개혁을 외치지만 정작 일어나는 것은 없다. 다산 선생에게 다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김병준: 사실 이번 대담도 바로 여기에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이 어려워지자 시진핑 주석이 '봉황열반'(鳳凰涅槃)의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봉황새가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자신을 태워 재가 된 다음 그 속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 정도의 개혁을 하겠다는 뜻이다.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개혁에 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석무: 결국 국민이 혁명을 해야 한다. 무엇으로 혁명을 하겠나. 선거로 해야 한다. 지역주의 투표로 잘하든 못하든 당선되는 그런 선거하면 안 된다. 그래야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정부가 제대로 움직인다.
김병준: 최근 다산 선생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라고 보나?
박석무: 약 10년 전에 한국은행에서 10만원짜리 지폐를 만들 경우 누구의 사진을 그 안에 넣으면 좋겠는가를 물은 적이 있다. 1번이 백범 김구 선생, 2위가 다산 선생이었다. 지금 다시 조사하면 어떻게 될까? 다산 선생이 압도적 1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강의도 책도 가장 잘 팔린다.
김병준: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만큼 답답해한다는 뜻이다. 아쉬운 마음에서 실없는 질문 하나를 하자. 만일 다산이 남인이 아닌 당시의 세력 주체인 노론으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석무: 노론으로 태어났어도 그 안에서 치였을 것이다. 모든 논리가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힘들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결국 그렇게 당했다. 특히 정조 이후에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씨족 중심의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무엇을 위해 권력을 잡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라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일했다. 그 속에서 다산이 살아날 수 있었겠는가. 개혁군주인 정조가 살아 있을 때는 임금이 보호해 주니 그나마 그만큼 움직일 수 있었다.
김병준: 지금의 시대에 던지는 의미가 크다. 모난 돌이 정을 맞으니 누가 세상을 바로잡자고 나서겠는가? 게다가 이런 사람을 보호해 줄 개혁군주도 없는데, 며칠인들 살아남겠나. 다산 선생을 통해 오늘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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