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간호원 자원해 떠납니다, 선생님 영영 못잊을 거 같아…
3편 서독에서 띄운 편지
선생님 몰래 떠났습니다. 선생님을 잊기 위해서입니다. 저가 떠나야 선생님도 저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지 못해 내린 결정이니, 용서를 빕니다.
선생님! 파독간호원으로 온 지 10개월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겨울인데도 영상 10℃의 따뜻한 날씨가 하루 종일 계속됩니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이곳에서 필을 든 저도 염려 덕분에 잘 있다고 전합니다. 몇 번인가 서투른 필을 들었다가 하도 고향 소식이 없기에 궁금히 여기면서도 그런대로 시간은 흘렀나 봅니다. 전번에 집으로 편지를 할 때 안부를 물었더니 동생이 영주에 안 계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나 보다면서 소식을 들으면 즉시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 속에 이렇게 필을 또 드립니다. 회답은 아니 주셔도 좋습니다. 다만 이 편지 받으셔서 잘 보시고, 건강히 잘 계시면 전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젠 아주 영주를 떠나서 서울에서 사시렵니까? 부디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잘되기만을 빌 뿐입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11개월째 접어들면서 그사이 늘 축복을 마음속으로 빌던 귀국한 오빠도 결혼식을 올리고, 눈물만 흘리던 1967년도 지나고, 68년도 2월로 접어들었으며, 봉화에 있는 친구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봉화보건소 신축공사가 준공이 되어 일부가 신청사로 나가고 소장은 의성으로 줄행랑을 놓고, 직원들의 봉급도 올랐고, 보건소에 여직원들이 판을 친다고 하더군요. 풍습이 같고 언어가 통하는 내 조국의 하늘 밑에서 왜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요? 이제는 모든 일에 대해서 회의라든가 슬픔을 갖지는 않겠습니다. 1월 중순부터 병원 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딴엔 노력한다고 하였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엔 거리가 멀고―지금은 그런대로 독일 말을 몇 마디씩 지껄여대니 역시 세월이 알려 주는지, 아니면 환경이 그렇게 말을 하여 주었나 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외과이며 부인과와 남자들이 섞인 병동입니다. 부인들이 훨씬 더 많으며 인기도 꽤나 있나 봅니다. 근면과 성실 검소한 독일 사람들, 조직적이고 규칙적인 그들의 생활에 감탄과 놀라움이 항상 내 마음을 새롭게 해주지만, 왜 이들과 같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슬픔뿐입니다. 어느 때는 내가 아는 대로 하여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엉뚱한 일을 해, 그들을 오히려 놀라게 합니다. 우리들에겐 최선의 친절을 베풀어주지만, 언젠가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면 봇물처럼 터지겠지요.
"시련을 이긴 민족이 위업을 남긴다"는 5'16 혁명정부의 캐치프레이즈를 외치며 "벌레 먹은 나무도 좋은 집 재목감이 되겠다"고 나는 이렇게 노력을 해보지만, 어디까지가 노력이고 어디까지가 태만인지 분간하기 힘드는 멍청한 바보가 되어갑니다.
그 잘 아는 기억력 참 기가 막힐 때가 있지만,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 하고 있습니다. 교만과 허위, 어둠이 뒤덮인 영주도 그동안 어떻게 변모를 하였는지요? 미련마저 두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영주이기에 잊지 못합니다.
오늘이 제 보잘것없는 생일날입니다. 한때는 영주서 홀로 '청춘무정'을 3번 반이나 보아 기록을 남긴 날이며, 선생님이 새로운 제 옷의 단추를 떼시던 날입니다. 벌써 잊으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어떻게 이 아둔한 가시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역시 여자란 하나에서 열까지 무서운가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고마울 뿐입니다. 비록 이렇게 멀고 먼 곳엘 왔지만 선생님은 항상 저와 같이 호흡하고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성의 손길이 항상 저와 같이 있습니다. 나의 의복 속에도 마음속에서도….
같이 있는 동료들이 내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어요. 기쁘기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많았습니다만 억지로 참았죠. 다행히 오늘은 휴식 날이어서 하루 종일 집에 있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그리고 고된 병원의 근무도 하지 않았으며 학교도 쉬는 날이었습니다. 내일부터는 또 그 지긋지긋한 병원 근무를 해야 합니다. 병원 근무 이외의 시간은 번역이라기보다는 일할 수 있는 장소가 있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계기가 되어 기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화살을 돌려야겠습니다만 잘 아니 되는군요. 한 해의 연륜을 모두 쌓고. 얼마만 한 소득과 인생의 플러스를 선물로 받았는지 의문스러우며 왜 남들처럼 단단한 마음과 몸을 가지지 못했는지요. 체력도 키도 모두 큰데 여기서도 또다시 '호박장군'이란 닉네임을 선물 받았습니다.
늘 입술이 부르터 있으니 병원의 다른 간호원(외국 간호원 아가씨)이 키스를 많이 해서냐고 해서 온 사무실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과 단련이 되면 나도 건강해지겠지요. 새해엔 더 큰 소망과 하시는 일의 번영을 빌며 건강도 함께 빌어 봅니다. 안녕! 68년 2. 11. 같은 하늘 밑에 살지 못하는 정 드림
선생님 곁을 떠나 아카시아꽃 냄새가 코를 찌르는 6월이 우리 주변에 와 멈추어 있습니다. 그동안도 안녕하셨습니까? 보내주신 서신 반가움과 슬픔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으로 병원 침대에서 읽은 지 퍽 오래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도저히 필을 들 자신조차 생기지 않아서 이렇게 글 늦었습니다. 이제는 그나마도 건강해져 내일부터는 다시 병원 근무를 하게 되어 천만다행이라 할까요?
이역만리 동떨어진 이방인이 몸마저 아파 누웠으니 그야말로 집 잃은 철새 신세는 행복한 편이더군요. 그러나 지금은 또 이렇게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 서러운 필을 드립니다. 비록 마음은 병이 들어 더러운 냄새가 나도 그 고약한 냄새 안 피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고집스러운 저의 심정은 어디를 가나 여전한 것 같습니다. 집에도 한 달 정도 편지를 못했더니 어찌 된 일이냐고 어머님의 편지가 3일이 멀다 하고 날아왔어요. 아마 아프다는 소리는 못 하겠고 그저 읽어만 보고 회답을 보류하기로 하였죠.
어머님 편지에 박정희 대통령이 영울선(영주~울진) 도로를 돌아보러 봉화에 왔을 때 비행기를 처음 가까이 가서 보고 저가 타고 떠난 비행기를 떠올리며 울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병원 창문 밖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흘리는 눈물은 어떻게 해야죠? 나의 조국! 나의 고향! 미운 선생님! 그리고 나의 다정스러운 어머니가 계시는 내 집.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가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매몰찬 한 여인의 비웃음은 내 전신을 움츠리게 합니다.
오늘은 내 나라 대통령 전용기가 없어 남의 나라 독일 정부에서 보내준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고 박정희 대통령이 루르 지방 탄광을 방문하는 날입니다. 나라를 대신한 광부와 간호원 몸을 지급 담보로 차관을 얻어낸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2천 명을 대표한 사람들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매일 새벽 4시 막장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글릭 아우프!'(GIueck auf'살아서 돌아오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는 광부들, 외로운 이국 땅 독일 하늘 아래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자. 그래서 우리나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자"는 대통령의 연설은 목이 메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끝내는 대통령도 울고, 곁에 계시던 육영수 여사와 뤼프케 서독 대통령, 그 수행원들도 함께 울고, 우리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우리 서러운 간호사들과 대통령이 남의 땅에 뿌린 뜨거운 눈물은 분명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내 조국 한국 땅에 열매를 맺는 싹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고향 생각도 잊어진다고 미리 온 선배가 이야기했지만, 잊어지기는커녕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가슴 아프게 그리워만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요?
그래도 세월이 약이겠지요. 시간은 벌써 1년이 넘어가게 하고요. 그만큼 제가 늙어가고 있다고 말해 주는 거죠? 지금 하늘에는 비행기가 또 지나갑니다. 떠나던 날 김포공항에서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고 온갖 힘을 다 썼지만, 봇물처럼 터지는 눈물은 나를 슬픔으로 몰아가고, 눈앞에 선생님의 모습이 눈물에 희미하게 멀어져 어른거렸습니다. 이런 정든 고향 고국을 떠나야만 하는 나의 가련함. 그 당시의 저의 모습을 어머니가 보셨다면 정녕 기절하시며 날 못 가게 붙잡았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 전 여기 와 있고 이렇게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은 틀림없는 꿈이 아닌 현실입니다. 지난날의 내 죄의 대가를 이제 여기 와서 모두 받나 봅니다. 바라시는 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건강을 빌며, 천주님의 가호가 항상 선생님을 보호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1968. 6. 3. 백림에서 선생님 곁을 떠난 정 올림
나의 오빠께
너무나 오랜만에 필을 들어서 무슨 말을 먼저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겨울도 벌써 다 지난 듯 포근한 날씨가 그저께는 백림의 땅 위에 비치었어요. 그동안 건강하시고 근무하시는 일에 번영이 있으리라 믿으며, 서투른 필을 얼마간 움직여 볼까 합니다. 새해가 지난 지도 벌써 두 달이 거의 되지만 서로의 서신 왕래가 없는 두절된 상태 속에서도 세월은 잘도 갑니다. 한 해의 연륜을 살아가며 노처녀(?)라는 닉네임이 붙어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 줄 압니다만 먹어 가는 나이를 누가 먹고 싶어 먹습니까? 세월이 먹여 주는 걸 어떡합니까? 정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하였는지 딱한 노릇입니다. 기억 속에 아 그것참 잘한 일이라고 느껴지는 일들은 하나도 없으니, 역시 세상 인간 속에 바보 축에도 첫째로 가나 봅니다.
그건 그렇고 요사이의 생활은 어떠하십니까? 내릴 줄은 모르고 오를 줄만 아는 조국의 물가에 대해서 앉으면 정부에 대해서 정치를 잘못한다고 야단이니, 코딱지만 한 반동가리 나의 조국의 밝은 날은 언제 오려는지 걱정스럽습니다.(아주! 애국투사나 되는 것처럼 으하하)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요? 참 불필요한 말만 쓰고 정작 써야 할 말은 마음속 깊이 잊었습니다. 하도 오랜만에 필을 들어서 편지 쓰는 방법도 다 잊었나 봅니다. 하긴 내 언제 편지 쓰는 방식 찾은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으나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은 이런 때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생각됩니다. 그 누군가 머리도 좋게 이런 나를 위해 예언을 해 놓았으니 말입니다. 돈이 많아서인지, 욕심이 많아서인지 학교라는 데 이름을 걸어놓고 하루하루 무엇을 배우고 오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껌둥이, 흰둥이, 노랑둥이가 다 모인 인종 박람회에서 정말 이곳 생활 지긋지긋합니다. 돈이 아까워 학교도 그만둘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마저 그만두면 나는 너무 늙은 것 같아서, 아직 나의 젊음으로는 무언가 하려고 움직여야 할 나이가 아닙니까? 우리 친구들은 나중 한국에 가서 독일어 선생을 하려고 그러느냐고 하면서 웃습니다만, 정말 내가 생각하기에도 딱합니다. 이 나이에 그것도 계약이 끝나면 곧장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독히 일하는 억센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인 독일이란 나라에 내 무엇이 좋다고 더 머물겠습니까? 날씨가 사람을 닮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날씨를 닮았는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독일 하늘과 독일 사람들. 이곳의 좋은 점도 없진 않지만 옳은 것보다는 나쁜 점 그리고 불평만 늘어놓으니 역시 나는 정신박약아인가 봅니다. 너무 시시한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속을 상해 드릴까 걱정스럽습니다만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미안합니다.
이제 더 오랫동안 머무르면 좋은 이야기를 보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독일 말을 지껄이게 되면 어떤 못난 독일 놈이라도 하나 붙들고 연애를 하게 될지 누가 압니까? 그때는 내 그런 이야기라도 써 보내겠습니다만, 연애 같은 건 시시해서 글쎄요. 고향 동생 왈(?) 어머님을 생각해서라도 돈을 아껴 쓰라고요. 그리고 세계에서 사람을 가장 잘 보는 사람이 독일 사람인데 많은 것을 배우라고 충고를 해 주었고요. 우리 모친 왈(?) 부디 한국에서 생활할 때처럼 그때의 착한 내 딸이 되어 돌아오라 하였습니다. 우리 모친은 아직도 내가 한국에서 착하게 산 것으로 생각하시나 보죠? 불쌍하신 우리 어머님! 어머님을 속인 거짓말쟁이 딸,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지난 일을 생각해 가슴 아파하면서 후회하느니보다 닥친 현실을 바르게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겠지요? 지난날을 자기 생활의 본보기로 삼아서 잘 되어만 간다면 더 좋은 약이 될 터인데요. 너무 많이 지껄여서 피로하시게 했습니다. 지금은 새벽 2시 반, 밤 근무가 끝나자면 아직도 5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부터 밤 근무를 시작한 날. 아직 일주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강과 안녕을 빌며. 1969년 1월 새벽에 백림에서 영원한 동생 정 올림
†주의평화.
또 한 해의 연륜이… 모스크바를 무색게 하는 눈이 11월경부터 지금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오고 또 녹고, 오고…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곳의 저도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으니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엔 더욱더 건강히, 하시는 일이 충만하시기를 빌겠습니다.
1971년 12. 18. 백림에서 마리아 드림
그동안도 안녕하셨습니까? 덕분에 저도 잘 있습니다. 다가오는 생신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엽서 한 장 띄웁니다. 아무쪼록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깝고 그리운 시간, 먼 조국 땅. 부디 복되기를 빌면서, 베를린의 정아는 진심으로 그리고 또, 성심으로 선생님의 모든 사업과 건강이 마음과 뜻대로 되시기를 멀리서 빕니다. 1977년 3. 19. 백림에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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