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영화 '암살'을 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은 대사다.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이 김구와 해방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씁쓸하게 한 말이다. 독립을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에게 미안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흔적마저 사라지는 것이 미안하다는 뜻일 게다.
과거를 다스리는 자가 현재를 다스린다고 여겨서일까. 힘이 생기면 생길수록 숨기고 싶은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반사다. 과거를 지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내 입맛대로 기록을 남기려 한다. 그런 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대구지역 언론 역사의 짜깁기 시도도 마찬가지다.
예전부터 대구는 신문과 친근한 도시였다. 해방 직후 신문 창간이 활발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대구에서는 해방 한 달만인 9월 15일 진보적 색채가 강한 민성일보가 창간하고 10월 3일에는 대구시보가 나온다. 그러나 두 신문은 해방 공간의 격변기를 넘기며 폐간되고 만다. 뒤이어 지금의 제호 그대로인 영남일보가, 해방 이듬해에는 매일신문의 전신인 남선경제신문이 창간한다. 이후에도 부녀일보 등 몇몇 신문들이 발행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만일 1945년 10월 3일을 창간일로 삼는다면 대구시보가 복간을 했거나 재창간을 한 것이다. 또 법적인 승계과정을 거쳤다면 이름을 바꿨더라도 가능할 수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발행 역사를 늘리려는 의도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신문방송연감에는 창간일이 몇 차례나 바뀌기도 하다가 홈페이지의 사장 인사말에는 1945년으로 못 박고 있다. 대구에서 발행되고 있는 대구일보 이야기다.
일제강점기를 빼면 해방 후 대구일보라는 이름의 신문은 1953년에 등장한다. 여상원이 당시의 대구시보 윤전시설을 적산으로 불하받아 신문을 창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더라도 대구시보와는 관련이 없다. 설비 시설을 샀거나 대여받았다고 승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구일보는 1972년 3월 31일 자진 폐간한다. 정치적인 이유를 대기도 하지만 프레스카드 발급을 둘러싼 금품수수 등이 폐간의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다 1989년 지역 언론인 출신에 의해 대구일보라는 제호의 신문이 다시 나온다. 한때는 대구지역 건설 회사인 보성으로 경영권이 넘어가지만 1997년 IMF 경제 위기로 부도를 맞자 대구일보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종간하고 만다. 지금의 대구일보는 그 이후에 나온 셈이다. 그런데도 대구일보의 창간일이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은 2008년 대구일보 사사를 만드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대구일보 사사에는 1972년의 대구일보 폐간을 휴간으로 바꾸고 대구시보를 대구일보로 둔갑시킨다. 또 일본인들이 만든 대구일일신문을 대구일보의 전신으로, 1945년에 나오지도 않은 대구일보를 창간했다고 밝히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착종(錯綜'이것저것이 뒤섞여 엉클어짐)이 되기도 하지만 검증은 뒤따라야 한다. 사사편찬에는 외부인사도 참여했다는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또 긴 역사를 가진 신문의 침묵도 의아하다. 대구일보가 1945년에 창간했다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 된다.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 1945년에는 대구일보가 없었다. 둘째, 1945년 10월 3일에 창간한 신문은 대구시보다. 셋째, 1953년에 나온 대구일보는 1972년에 폐간되었다는 점이다. 역사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당연히 수정해야 한다. 이 칼럼에 쓴 내용이라고 다르지 않다. 다만 뚜렷한 근거 없이 역사적 사실에 손을 대면 진짜를 본떠서 가짜를 만드는 일처럼 뒤죽박죽 되고 만다.
김원봉의 말에 김구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더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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