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사랑에 죄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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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퍽 노곤하며 등허리에 끈끈한 고통이 묻어납니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대구 간호학교에 온 지도 한 달이 흘러갑니다. 그날 무사히 잘 올라 가셨습니까? 그리고 그 동안 안녕하셨으며 사모님께서는 안녕 하신지요? 귀여운 아가들도 잘 자라겠지요? 이곳 전 염려 덕분에 잘 지냅니다.
6일 날 저는 대구 간호학교에서 3일 날 부쳐 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26일 날 부치셨다는 옥서는 받지 못해 서운합니다. 선생님이 올라가시고 즉시 글을 드린다는 것이 겨우 오늘에야 필을 들게 되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사이 저는 나름대로 퍽 바쁜 일과들이긴 하였습니다만…화요일 날엔 대학병원엘 견학을 갔고, 수요일 날은 동촌에 있는 고아원에 봉사를 갔습니다.
부모 없이 자란 불쌍한 고아들의 눈동자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그네들의 눈동자는 구원을 바라며 사랑의 그 무엇을 애원하는 듯한… 21일 날 또 갔습니다. 이번엔 학원대표단만 갔습니다. 전번엔 다른 곳에 갔다가 시간이 조금 있어서 들렸기 때문에 속속들이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하잘 것 없는 불장난으로 태어난 사랑을 잃은 생명들이 여기…
선생님! 너무 기분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단시간 안에 본 표정들 속에서 그런 것들을 느꼈으니까 말입니다. 선생님! 토요일 날은 학원에서 소풍을 갑니다. 안봉화 선생님께서 절보고 소풍을 가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안 간다니까 학교대표가 안 가면 어쩌느냐고 야단하시더군요. 아무튼 염려 말고 가자고 하시는 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의 생각은 웬 일일까요? 고향의 하늘이 고향의 봄빛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선생님께서 간호학교 입학식 때 찍은 사진은 잘 되었습니까? 몹시도 궁금합니다. 제 딴엔 열을 올렸는데 우스꽝스러운 저의 표정이 생각나서 혼자 웃곤 합니다. 그 날은 참 즐거웠습니다. 역에서 돌아 나올 땐 이제 나의 주변에 가까이할 아무런 사람도 없다는 퍽 적막감 속에 잠겨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나타나셨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동정이라고 핀잔을 주셔도 좋습니다. 선생님! 제발 저의 이 기쁨을 무너뜨려 주시진 마세요.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피어오르는 내 마음속의 기회였는지 모릅니다. 피어오르는 죽순이 꺾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죽순이 영원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원순은 죽었고, 그 옆 새가지가 가늘게 이제 돋아나려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잘만 키우면 원순처럼 곧지는 않아도 어쩌면 더 단단할지도 모르는 가느다란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요즘의 저의 생활입니다.
선생님! 또 한 가지 기쁜 일은 이번 월요일 날 시험을 쳤는데 모자보건은 100점을 받았습니다. 저의 반에서 저뿐이라고 선생님께서 칭찬을 하여 주셨습니다. 속으로 싫지 않으나 누가 거름을 부어 주는데 게으름을 피우겠어요. 밤이 어지간히 깊었습니다. 기숙사 동무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반주를 맞춥니다. 끝으로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란 밑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도덕이란 옷과 예절이라는 굴레를 쓰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야수성을 뽑을 수 있다가는 반성하는 마디에 소스라쳐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비로소 사람이다" 란 말을 끝맺음으로 장식할까 합니다. 내내 안녕히 계세요.
1965. 5. 9. 대구에서 정아가
보리가 패기 시작한다는 고향의 소식을 받고 기쁩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곳 전 염려덕분에 아주 잘 지냅니다. 허리의 통증이 약간 고통이긴 하지만…보내주신 옥서 잘 받았습니다. 특히 울상을 한 사진도 잘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사진실력이 아마추어는 능가합니다. 편지는 어제 저녁(토요일 날)에 받았습니다.
어제는 우리 학원에서 소풍을 갔었습니다. 날씨가 흐려서 나빴지만 모두 유쾌하게 놀았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전 소풍을 안 갔어요. 어디를 갔느냐고 놀라겠지요? 애인과 데이트? 천만에 말씀. 우리 수성병원에서 나가는 공무원 신체 검사장에 나갔습니다. '중소기업은행'엘 갔었는데 오전엔 혈압을 재다가 오후엔 신장, 체중, 흉위를 재었습니다. 키가 줄어들었다고 불평하는 사람. 몸이 너무 비대해졌다고 걱정하는 사람. 가지가지였습니다. 특히 여사무원들은 웬일이냐고 내일부터는 밥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방정을 떠는 이도 있고요.
특히(기억?) 해야 할 일은 흉위를 재는데 어떤 청년이 러닝셔츠를 걷어 올려 가슴을 다 들어놓지 않겠습니까? 자 눈금을 보다가 재려고 보니 청년의 새까만 젖꼭지가 있잖아요. 너무 황당해서 내려도 된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셔츠를 내려도 된다고 해서 일은 잘 풀렸지만, 처음 나가는 실습이고 보니 어리둥절하고, 그런 광경에 황당해서 아주 혼났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붙는 것 같습니다. 자- 이만하면 연애는 잘했지요?
선생님과 만난 날이 이제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까마득한 옛날 갔다면 과장된 표현일까요? 다가오는 18일 날은 내려오시는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편지에 물으신 '우리가 만나는 날' 대구에 오시는 날에 대해서인데, 매월 새달의 첫 일요일이 어떻습니까? 아마 그 날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전 번에 갔었던 대구역 앞에 있는 '보리수 다방'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부처님이 쉰 나무그늘, 이름이 좋잖아요.
11시 15분에 도착하시면 아마 11시 30분까지는 되겠지요? 11시 15분에 '보리수다방'으로 나가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혹시라도 차가 연착되면 제가 거기서 12시 20분까지는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일요일 날은 애인과 데이트 약속을 해야 하니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 아시고 오늘은 이만 줄이고 싶습니다. 혹 이날이 싫으시면 선생님이 정하세요. 18일 날은 학교에 오라니 말입니다. 혹 오시면 학원으로 오시길 바라며, 이만 안녕히 계십시오.
1965. 5. 12. 선생님의 정아가
필을 듭니다. 책상 위에는 이제 막 꽂아둔 옥잠화와 물망초, 돼지 꽃, 카네이션이 한데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회답을 곧 드리려고 해도 18일 날 내려오신다기에 그날은 하루 종일 학원에서 기다렸습니다. 더욱이 개지 못한 하늘은 내 마음에 반주나 해주듯 비는 무척 추적추적 내리더군요. 오후 5시가 넘어서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농가에서는 환호를 올릴 좋은 단비였지만 그 날의 비는 저에게는 짜증스럽게만 느껴지더군요.
화요일(21일)날은 선생님의 옥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진도 잘 받았습니다. 안 그래도 뚱뚱한 뚱보가 그 사진엔 더 뚱뚱해 보여서요. 호…편지 내용보고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제 동생한테서도 편지가 왔더군요. "누나! 전 누구보다도 누나를 기대합니다. 고향에 있는 큰누나도 있지만, 누나만은 못합니다. 더욱이 요사인 객지에서 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십니까?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노력하는 누나! 초라하지만 이 동생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참되고 알뜰하고 정신 건강한 나의 누나가 되기를 빕니다." 저의 기대를 어기는 절 슬프게 만들지 않는 누나를 생각하며, 또 있습니다만, 동생이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글에 대해서 전 어떤 대답을 보내야겠습니까? 지난날의 일들이 분명히 제가 겪은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 때문인지…저가 수 놓아드린 액자에 대해서는 많은 의아심을 품으시는군요. 사실 그것은 수본이 있는 것을 제가 며칠을 두고 고치고 다시 삽입시키고 해서 만든 도안입니다. '신풍'(新風)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날의 선생님 마음의 일부분이었을 겁니다. 아니 지금도 그래요. 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선생님의 마음은 평상(처음 사모님을 맞이할 때)의 기분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그리고 이는 곧 선생님의 결심과 마음에 따른 문제입니다. 전 요사이 기도시간이면 이 문제에 심각한 정신을 기울이고 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꽤나 건방지고 아니꼬운 가시나라고, 담배연기 뿜어 올리는 사이에서 비웃으시겠지요?
선생님! 육체와 정신! 이제 죽어도 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은 몸이라고…선생님이 주신 선물로 요사이 귀가 소리가 통 들리지 않는군요. 혈압을 재는데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아 혈압을 못 재겠습니다.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곳에 와서 이렇게 바동거리는 지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그 한 예로 나와 조지훈 선생님입니다. 천재의 훌륭한 시로 목마른 자의 목을 추켜 주시던 선생님, 그렇게 빨리 저 세상으로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인간은 역시 허무하고 무상하나봅니다. 이런 마음이 계속된다면 염세자살 자의 수가 두 배로 증가하겠지요? 불완전한 인간들이기에 종교가 생겼고, 신을 믿고 의지하며, 비틀어진 마음들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가 보죠. 그러기에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지 모르겠고요.
내일은 약품관리 시험이 있습니다. 흐트러진 내 육체와 정신에 그래도 공부의 기능은 나의 정신을 일깨워주며, 흐트러지려는 내 마음을 새로움으로 깨어나게 하나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큰 감사드립니다.
술! 너무 과음하시지 마세요. 술은 알코올입니다. 알코올 속에는 산성이 있습니다. 우리 위에서는 산성(소화액)이 또 나옵니다. 이것과 알코올 속의 산이 합쳐지면 위산과다를 일으켜요. 위염이 오고요. 다음은 위암이 오고요. 제발 부탁입니다. 쥐꼬리만 한 지식을 최대한으로 활용합니다. 밤이 어지간합니다. 이만 아듀!
1965. 5. 22. 대구에서 망나니 드림
34℃라는 무더운 기온이 오릅니다. 무사히 상영하셨으며 그 동안도 안녕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곳 전 염려덕분에 잘 지냅니다. 진작 서신 드리지 못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월, 화 이틀 시험 친 중에서 월요일 날 시험 친 점수는 70점도 체 못 돼 속이 상해 죽을 것만 같습니다.
화요일 날 시험 그럭저럭 친 것 같습니다만 여하튼 속이 상해 죽겠습니다. 수요일 날은 '한일은행' 신체검사를 갔습니다. 오늘은 현충일이어서 학교는 쉬었습니다. 8시쯤 아침에 일어나는 굉장한 느림보장이가 되어서 걱정입니다. 어깨가 쑤시고 온 정신이 권태감에 싸여 움직이기가 싫었는데 오늘 월남에서 저의 오빠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고향의 어머님께와 오빠께 같이 이렇게 잘나가지 않는 필을 들었습니다.
지난 2일 날은 생각만 해도 속이 상해 어쩔 수가 없었으며 귀하신 몸이 아니라 너무 사람을 믿었기 때문인가 보며, 어쩌면 내가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어지간히 미련한 가시나라고 후회를 무척 했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며 시간이 지나면 먼 아득한 옛날이야기겠지만, 그 당시는 정말 제 자신을 어떻게 주체할지 모르겠더군요. 머나 먼 길을, 오직 절 만나려고 오시는 마음. 거기에 비해 전 어떠한 요구도 희생도 해 들여야 할 터인데, 저 나름대로의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갈피 못 잡게 만드나 봅니다.
처녀? 이번 미스코리아 경북 진(眞)에 당선된 이지은 양의 경우 얼굴만 잘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여자는 마음과 정신이 청정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만들며 내 주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오빠! 선생님이 아니라 이젠 오빠라 불러도 별로 어색한 어귀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돌보아주는 나의 영원한 사랑하는 오빠, 벗! 선생님! 애인! 지도자! 어떻습니까? 사전을 동원했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오빠가 결혼 전의 사이라면 우리는 그럴 수도 있고 또 별문제 없지만, 나로 인해 나 하나로 슬퍼할 주위사람들이 내 앞에 하나 둘 나타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고 사랑에는 물불을 가릴 것이 아니라 하지만 동양예의지국이라 일컫는 우리 한국에서는 아직도 사랑보다는 법과 도덕을 존중하며 예의가 더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착한 딸이라고 내게 기대를 걸고 계시는 어머님이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만듭니다. 학원에서는 안 선생님께서 어제 실습 마치고 학원에 가니까 절 불렀어요. "순녀는 내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학생이다. 기대에 어긋나게 했을 때에는 무척이나 슬픈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대에 다할 수는 없지만 학교 측에서도 너의 행동 말씨 등이 타의 모범이 됨으로 무척 큰 기대에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주었으면 고맙겠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그분의 얼굴은 근엄함과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행동들을 낱낱이 다 알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아서 얼굴이 뜨거웠습니다만, 그런 이미지를 떠나서도 별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나 자신을 체념해 볼뿐이었습니다.
발랄한 웃음이 웃고 싶습니다. 가슴을 확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대주신 학교등록금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니, 어머니께서는 왜 그렇게 큰일 날 일을 하였으며, 나중에 어떻게 은혜를 갚으려고 그러느냐고 상의 없이 한 저의 행동에 책망을 주시고는 참으로 고마워 어떻게 할 말이 없으며, 영주에 직접 찾아가서 고맙다는 인사와 부인도 뵈었으면 좋을 텐데, 혼자 손에 여의치 않아 마음뿐이라고 편지를 보내셨으며, 끝에는 너는 역시 부모님의 욕을 보이지 않고 남의 축복 속에 사는 훌륭한 딸이 되어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곧게 먹어서 하나의 행동에 대해서도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따끔한 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오빠! 그리고 오늘 월남 간 오빠가 5월 31일 날 베트남 다낭을 떠나 참전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다고 편지를 보내 오셨습니다. 너무나 기뻐 울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오빠가 어머님의 이야기를 통해 영주의 오빠를 만나 뵈올 것 같습니다. 이 달 중순경에 고향에 가면 그 때 오빠와 같이 뵈옵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마중은 원치 않습니다. 저도 안 나갔는데 뭘요. 아직 갈 날짜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화 드리겠습니다. 내내 안녕.
1965. 6. 6. 대구에서 동생 드림
이 글을 드립니다.
지금은 점심시간입니다. 다른 학생들은 다 점심을 싸가지고 오고, 저 혼자 기숙사에 와 이 글을 씁니다. 고독. 참으로 무섭군요. 이토록 무서울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날은 오실 것이라는 커다란 기대 속에 2주일이 지나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지루했을까요? 하지만 기대는 산산이 부셔졌습니다. 제가 부셨는지 선생님이 부셨는지는 따질 것 없습니다만, 엄격히 구별한다면 제가 부셨을 것 같군요. 그 순간들을 넘기기엔 저의 인내가 너무나 모자라지만, 지금에 생각하면 참으로 장한 일이었으며, 선생님 역시 참 도덕군자였어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우리들이었으니까요. 그런 순간들이었다면, 남자 분이 저하나 정도의 가시나 못 이겨내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뜨거운 감사와 사죄를 드립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절 굉장한 이기주의자라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전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성을 갖고 냉정히, 그리고 명확하게 생각해보셔요. 저를 "사랑 한다"고요.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아! 너 없으면 못산다." 하신 말씀, 뭘 어떻게 하자고요. 부인을 버리고 도망을 가자던 선생님께서 전 번에 저에게 하신 말씀 지금 생각만 해도 겁이 납니다. 저 하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눈물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홀로 흘리겠습니다. 아니 지금도 흘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성이 있으면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다. 무조건 밀고 들어가 자기가 점유한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한 요사이 여자들의 현대판 심리를 '여원' 책에 분석해 놓았더군요. 그 다음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어려운 고비 숨 막히는 흥분 상태의 순간들을 참고 넘어가는 것도,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들지 않고, 곧고, 바르고, 참되게 살고 싶은 마음들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은 운명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 그늘진 운명들은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너무 인간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정의적이며 서정적으로만 생각했고, 내가 그리는 마음의 정원 속에는 그런 깨끗한 사람들만 그려 넣었는데 대해서 오늘의 냉정한 마음의 밑바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들이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이며 어느 지점에 멈추어져서 나를 어떤 행동을 내포하게 할지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이런 생각들은 오랫동안 못 잊고 못 헤어날 것만 같습니다. 지난날에 대해서는 후회하지도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표정이 없는 소녀' 감사합니다. 그 동안 여러모로 생각과 은혜 진데 대해서는 갚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아직 절 너무 외롭게 팽개쳐 두진 마십시오. 전 비탈길에 선 외로운 나무입니다. 아직 뿌리가 채 내 몸을 지탱 할 만큼 깊이 박혀있지 않습니다. 이제 뿌리를 뻗으려고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다가 적당한 수분과 영양분을 누가 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커 가는 죽순을 꺾지는 말아주십시오. 내내 몸 건강 할 것을 빌며 안녕히 계십시오.
1965. 6. 24. 낮에 이기주의 가시나 드림
억센 소나기가 한줄기 쏴― 아스팔트 위에 혼잡한 먼지가 알더니, 억센 비엔 사물들이 맥을 못 추는군요. 그날은 무사히 가셨는지요? 염려 덕분에 잘 지냅니다. 아무런 미련 없이 필을 들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었지만, 3일을 채 못 넘기고 또 다시 필을 들었습니다. 차라리 글 한자라도 알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마음 편한 가시나가 되었을까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지금은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오빠! 얼마나 정답고 다정한 부름입니까? 하지만 이렇게 불러야 하는 제 마음, 지금 착잡한 기분에 젖어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오래오래 묻어두고 불러야할 영원한 부름을 잊어버린 허전한 마음, 저의 가슴속엔 이제 영원히 불러야 할 이름도 아무 것도 없군요.
오빠, 이렇게 불러야 하는 내 마음보다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오빠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건 이해를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만, 서로가 참아야만 먼 훗날 세월이 지나면, 서로가 걷는 평행선 길에서 지난날의 추억들을 이야기 할 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이 미래에 살고 현실을 탈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나 봅니다. 조용히 야음을 타고 뚜― 통금 사이렌 소리가 은은히 들리어 옵니다. 엄마가 몹시도 보고 싶어 달을 보고 울었습니다. 남몰래 울지만 시원한 마음이 될 리는 없습니다. 오빠! 오빠야! 모든 꿈이 모든 일들이 다 물거품 같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의 한 가닥 외침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위대한 사람의 업적은
미래를 통하는 길을 닦는다.
염세는 인간을 악으로 만들고
낙천은 인간을 힘으로 이끈다.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것 속에
살고 있다는 겸허와 성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우리에게 신념을 줄뿐
구하는 길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다.
늘 편안하시길 천주님께 빌겠습니다. 술은 정말 싫어요. "정아는 내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신다면 마지막 드리고 싶은 단어입니다. 그렇다고 음주를 금하라는 건 아닙니다. 남자 분들이 술을 한잔도 못하는 것 또한 맹꽁이입니다. 폭음의 직전에서 깨어나 떨치고 일어서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 밤도 안녕히. 항상 오빠께 주의 은총이 내려주시길 기도하며 다음 때까지 잘 있어 주세요.
1965. 7. 10. 서러운 가톨릭신도 정아 드림
무사히 잘 가셨으리라 믿고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염려 덕분에 별일 없이 잘 지냅니다. 점심도 못 잡수시게 하고 먼 길 올라가시어 마음이 몹시도 아픕니다. 월요일부터는 보건소에 실습을 했습니다. 어려웠지만 이겨 나갈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지난날은 모두가 즐겁고 아름답고 했었는데 그 즐겁고 아름다움 뒤엔 돌이질 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내 가슴을 따갑게 합니다.
저 지평선 너머로 해가 저뭅니다. 유유한 낙동강이 평화롭고 무심히 꿈틀거리며 흐릅니다. 박꽃이 피었다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저녁이면 함초롬히 이슬을 맞으며 피는 소복 여인 같은 그 하얀 박꽃이 몹시 보고 싶군요. 그리고 철부지라고 나무라시는 어머님의 음성이 듣고 싶습니다. 학교 선생님께 잘 이야기 드렸습니다. 그래서 7일 날은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마중은, 없는 시간에 애써 나오실 필요는 없고요. 오시고 싶으면 와 주셔도 되고요. 역시 인간입니다. 인간이 인간 이상을 추구하며 그렇게 되도록 바라던 내 순결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이런 냉정한 가시나 로 변화를 시키는지 모릅니다만, 한번 잘못 되었다고 생각이 들고 한번 그렇게 생각하면 왜 그렇지 않다고 변경시킬 수 없는 옹고집이 되었는지?…
조물주가 날 분명히 그렇게는 만들지 않았을 텐데 못된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든 거죠. 지금쯤 청량산 외딴 산골짜기엔 산머루가 까맣게 익어 가겠군요. 언젠가 낙엽이 뒹구는 신작로 길을 손잡고 정답게 걸으며, 우리 때 묻지 않은 인생의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오겠지요.
오빠야― 이렇게 지면을 통해 혼자서는 잘 부르는데, 대해서면 왜 못 부를까? 부르려고 생각이 들면 옛날 내 존경하던 선생님 한 사람을 잃어버린 다는 서운함. 인생이 살면 얼마를 살겠습니까? 허무하게 살기 전에 좀 의의 있게 남에게 도움을 주고 무언가를 꼭 남기고 돌아가야 해요. 시간이 없네요. 선생님! 뵈올 때까지 내내 안녕히 계셔요.
1965. 9. 3. 아침에 정아가.
안녕하셨습니까? 염려 덕분에 잘 내려와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아무런 쓸 말이 없어집니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듯 자꾸만 없어집니다. 그리고 저에게 전해주신 편지는 저녁에 대구 형님 댁에 갔다 드렸습니다.
오빠! 몸이 천근같아 집니다. 몹시도 피로합니다. 오빠는 나보다도 더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내려오는 차안, 불어오는 바람결에 내 마음도 날려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 푸른 들판에 가난을 모르고 자라나는 파란 곡식들에게 내 얼굴을 묻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는 인간이 돌아가야 하는 흙, 그 흙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석양이 물들면 내가 묻힌 흙더미 위에도 영롱한 석양빛이 비칠 것이라는 생각, 쓸 때 없는 잡념을 털어 버리자고 몇 번이나 도리질을 했었지만, 영 꼬리를 무는군요.
오빠야― 지금은 달이 휘영청! 밝았습니다. 언젠가 지난날은 같이 둘이 손잡고 거닐었죠. 그것도 피로하다는 핑계로 내가 먼저 내려왔죠. 언제나 내 말만 잘 들으시던 선생님! 오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의 생각.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추억을 남기고 싶었지만…지금은 소장님이 서울 가고 안 계시는군요. 10월말 11월 초순엔 여행갈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그러시면 더는 안 돼요. 만약 그러신다면 저도 응하지 않지만 12월로서 굿바이.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러고 싶지 않지만 서로를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만약 집에서 여행 사실을 안다면 나는 이 세상 끝까지 처량한 유랑생활을 하여야 하는 나의 길. 그러나 결코 비틀어지지 않을 랍니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남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도 불륜의 사랑은 싫습니다. 정조는 다른 사람에게 주더라도 결혼상대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남편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잘해주면 된다고 하지만, 그럴 자신이 영 없어요. 평생 양심에 오는 가책을 어떻게 받으면서 살라고요. 살 자신이 없어요.
가을이 문턱에 다다라 옵니다. 환절기에 부디 감기를 몸조심하십시오. 술이나 너무 밤늦게 다니지 마세요. 눈에 보이지 않게 귀하신 육체를 좀 먹어 갑니다. 부디 몸조심하시며, 뵈올 때는 기쁜 얼굴을 그려봅니다.
혹 회의 등등의 일로 대구 내려오신다면 전화를 꼭 걸어주시도록 부탁합니다. 내내 안녕 하소서. 나의 귀한 사람 오빠 선생님. 오해를 하셔도 좋습니다. 되도록 편지 쓰는 걸 삼가겠습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따가워 견디기가 몹시 힘듭니다.
1965. 9. 11. 밤에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은 새벽입니다. 아직도 아픈 머릿골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이 윙윙 웁니다. 어제는 하도 아파서 보건소에 결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객지에서 아프면, 더 오래 계속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는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새벽에는 다소 개운한 기분이 들어 이 글을 씁니다. 아마 절 물심양면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시고 건강 하라고 빌어주신 오빠의 덕분이겠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픈 고통 속에서도 지금 내가 이 순간 죽어 버린대도 원한이 없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여주었습니다. 몇 번인가 이야기 드렸지만 나는 누구에겐가 지독히 사랑을 받은 행복한 가시나라고요.
그러나 전 사랑을 알기 전에 무서움이 나를 몰아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사모님에 대한 죄의식, 도덕은 고사하고라도 말입니다. 아차! 되도록 명랑한 이야기를 쓰려고 처음 필을 들었는데 깜박 잊었네요.
그리고 저의 보건소 근무 문제인데요. 10. 1일부터는 봉화보건소에서 실습을 하겠으니 잘 말해 주십시오. 여기서는 선생님이나 여러분(소장님 등)께 다 이야기 해 놓았으며 남구보건소 방역 계장님도 학교에서 그렇게 해주면 남구보건소에서 근무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빠! 추석이 다가온다고 벌써부터 법석을 떱니다. 오후 근무를 마치고 퇴근길에 늘 무언가 공상에 잠겨 나만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그러니깐, 택시를 탈 때마다 내릴 곳을 지나 기사한테 야단을 맞고는 소스라쳐 놀라기도 하고…놀라움 뒤엔 나대로의 생각들이 줄을 잇다가 뚝 끊어져 버린 슬픔에 잠기기도 하고요.
오빠! 코스모스가 만발했습니다. 그 가냘픈 코스모스가 말입니다. 지나간 날은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아름답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서울에서의 그 밤도 좋았습니다. 놀라움과 다행함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그때가 좋았습니다. 지금은 신경이 축 늘어진 만성 상태입니다. 이것이 마음과 몸이 늙어간다는 것일까요? 아직은 늙고 싶지가 않은데…가로수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가을은 옷을 입은 아가씨들의 허벅다리를 더 훤히 들어다 보이게 합니다. 그놈의 바람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의 더 깊은 속살을 보고 싶었나 보죠. 바람은 짓궂은 놈입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있어서 낙엽이 뒹구는 길가. 산야에서 때 묻은 인생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하면서 이만 여기서 줄일까 합니다. 팔이 후들거립니다. 그러면서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태까지 가장 슬픈 일은 제가 고향에 안 가고 남구보건소에 근무한다니까 거기에 애인이 생겼나 보다고 하신 말씀, 믿어도 안 믿어도 좋습니다. 꼬치꼬치 따지기가 싫습니다. 부디 봉화보건소 문제에 대해서 상세히 답변 해주셔요. 오늘은 여기서 필을 놓겠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처음엔 촛불이 기운차게 타고 있었습니다. 밝고 윤이 나게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촛불이 바람에 다 꺼져 갑니다. 이 마지막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내 마음에 미움이 오기 전에 이대로 멈추게 해 주십시오.
1965. 9. 18. 아침에 대구에서 정아가
안녕히 계십시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나머지 제가 마지막 취해야 할 길이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염려 덕분에 이렇게 잘 있는 정아는 마지막 안녕을 빌어 봅니다. 정말 그 동안 폐 끼치고 은혜 진일을 생각하면 무어라 인사를 드리고 어떻게 해야 갚을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길을 정해놓고 있으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나의 마음을 흔들리게 합니다. 더 살아야하겠다는 의욕보다는 이만큼 내게는 만족하다 라고 나 스스로가 자위를 해 봅니다. 다만 제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불효이고, 선생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도 못 갚아 드리는 나쁜 년. 그렇게 선생님이 원하는 내가 되어드리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몹시도 서럽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셨습니다만 역시 전 선생님을 사랑하진 못했습니다. 이는 요사이 흔해빠진 신파적인 그런 사랑에 비하면 피보다도 더 진한 사랑보다도 더 강했습니다만.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랑했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몸이 중요합니까. 그까짓 몸뚱이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나 결코 사랑이라는데 무마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처음의 제 마음에 비해 약간의 빛이 퇴색한, 역시 존경입니다. 그러나 나 하나로 인해 '존경'의 단어의 신성한 본질을 상실했다면 이건 참 죄송한 일입니다.
선생님. 밤이 어지간히도 깊었네요. 몇 번인가 주저하다가 옷을 사 달라고 졸랐었는데 정말 사주시는 선생님의 아량에 다시 한 번 기쁨을 느끼면서…그리고 마음속으로 무한히도 미안함을 느꼈지만 한 계집애를 알고 그리고 서로 마음을 주었는데 내 소원은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요구했던 겁니다. 정말 지금 이 시간에도, 내가 어떻게 그런 요구를 했을까하니 나 자신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아직 몇 잎이 남아있는 앞산 미루나무의 잎사귀는 오늘밤엔 이젠 다 떨어지겠지요? 그 잎이 떨어지면 내 생명은 끝이려니 생각한 내 신념이 어쩜 맞을는지도…
선생님이 사주신 옷을 목욕을 하고 갈아입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 추위에 웬 목욕이냐고 꾸중을 하셨지만…브래지어를 보고 폭소 끝에 눈물이 글썽이었어요. 어찌나 큰지?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꾹 참고 그대로 입었습니다. 셔츠도 입었습니다. 분홍빛이 형광등에 퍽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흡사 시집가는 첫날밤 새 아씨처럼 말입니다. 짜릿한 아픔을 맛보았으며, 육체적인 고통에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려야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모든 걸 다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대구에 있을 때 애인이 생겼느냐고 몇 번인가 말씀하셨죠? 선생님이 생각하시듯 그렇게 헤픈 계집애는 아니랍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선생님! 며느리를 보겠다고 수선을 피우던 그 사장 댁내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선생님에 대한 죄의식 같은 걸 느끼던 저였습니다. 정조를 외식 한번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퍽 행복한 계집애라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전 행복했습니다.
먼 동리에서 첫 닭이 웁니다. 건너 방에서 어머니께서 왜 아직 자지 않느냐 하시면서 불을 켜 놓고 자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지막 어머님의 음성을 음미하며 선생님! 아 저의 선생님! 내내 안녕히 계셔요. 마지막으로 너무 과음은 위장에 해롭습니다. 안녕히. 1965. 11. 12. 정아가
또 필을 듭니다. 왜 죽지 않고 또 필을 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만 죽었으면 서로가 편할 텐데…깨어보니 낮12시가 거의 다되어가고 희미한 기억 속에서 소변이 몹시도 마렵다는 기억 뿐. 아버진 어제부터 외출하셨고, 어머니께서는 몇 밤을 자는 지 두고 보려고 그만두셨답니다. 아침을 먹으려고 온몸을 뒤흔들며 깨워도 꼼짝도 안 하기에 가슴엔 선생님의 사진을 꼭 껴안은 채…망측한 계집애라고 어머니께서 꾸중을 하십니다. 다 큰 처녀가 속옷만 입고 그렇게 자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입니다. 더욱이 그분이 선물 주신 것을 그렇게 헤프게 입어서 되겠느냐 면서 선생님한테서 온 편지 대구 친구들과 안 선생님한테서 온 편지 등 자그마치 5통. 보잘 것 없는 저를 위해 그토록 아껴주시는 나의 선생님. 사정이 여의치 않거든 빨리 대구로 내려와 마지막 공부를 하라는 안 선생님의 편지, 늘 교실에 정아가 앉았던 자리를 찾고 하다가 고개를 돌리신 답니다.
선생님! 먹었습니다. 열 알만 먹고 몇 분인가 기다렸습니다. 혼미해지는 기억 속에 더 먹어야겠다고 중얼거렸는데 나는 먹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자살미수'라고 대명사를 붙일 것인지? 선생님! 대구엔 몹시 가고 싶기도 합니다. 나를 위한 애인이 목이 타게 기다릴 거예요.
선생님! 선생님의 편지 잘 받았습니다. 강 기자가 구속되었다니 역시 세상은 평등하게 조물주가 조종을 하나봅니다. 아내를 버리고, 그렇게 자기만을 위한 행동을 한다면 엄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죠. 그러나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 질 때 고생 꽤나 하겠군요. 저도 언젠가는 벌을 받아야하죠? 어머니께서는 다시는 준다고 그런 선물을 받아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셔츠를 선물로 주셨다고 내가 말했음) 그 죄를 네가 못 받으면 너의 남편으로 인해 꼭 받는다고 야단, 호통. 선물을 받을 만큼 이 대가를 했어야지 다 큰 계집애가 무어냐고…
선생님!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합니까? 제가 지은 죄에 대해 회피를 하려는 묘한 방법일까요? 선생님이 까만 돼지 새끼를 한 마리 사서 제 가슴에 안겨주셨습니다. 고놈의 새끼가 저의 가슴에 막 파고들지 않겠어요? 몹시도 간지럽고 징그러웠는데, 선생님은 옆에서 짓궂게 웃고만 계시더군요. 깨어보니 역시 꿈.
허허벌판에 코스모스가 만발했습니다. 올해는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정서 속에서 살지를 못했던 탓인지 코스모스가 몹시도 사랑스럽습니다. 손아귀가 벌어지도록 꺾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모습을 지켜보시고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뒤따라 뛰었습니다만, 제 걸음은 왜 그리도 안 뛰어질까요. 어느 결에 선생님은 저와의 저만치 뭔 거리에 계셨습니다. 큰 강물이 흐르는 앞에 강 저편에서 웃고 계셨습니다.
정아,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련다"고 입에 손을 대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귀에 찡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잠이 깨었습니다. 하필이면 제게 스피노자의 명언을 들려주셨을까요? 평상시에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었는데 다시 한 번 죽지 않았다는 데에 이상한 의욕 같은 걸 느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12일을 위해 내 몸과 마음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돕니다. 선생님! 정말 전 서러운 인간입니다. 한 무리에서 떠나버린 어미를 잃어버린 어린양입니다. 선생님이 한 무리의 양떼로 절 인도해 주셔야겠습니다. 머리가 몹시도 아픕니다. 이만 안녕! 내내 몸조심하십시오. 1965. 11. 13. 밤에 정아가
안개가 자욱한 신작로 길을 힘없이 더덜더덜 걸었습니다. 그 동안도 아니, 밤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저도 염려덕분에 이렇게 잘 재잘거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늘 제가 폐만 끼쳤지만, 어제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전화를 걸어놓고 영주를 나왔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전화에 아직 출근도 하시지 않으셨다 하기에 혹 또 어디에 출장을 가셨나 싶어서 그저 영주에 발이나 들어놓고 싶었습니다. 구성공원에 올라 가만히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왜 혼자 쓸쓸히 여기에 와 앉아있을까? 아니 왜 와 있어야 하며 지금 도대체 난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가를 나 혼자 자문자답을 하면서 언젠가 선생님과 제가 나란히 앉았던 그 바위에서 생각했습니다. 소슬한 산바람만이 내 머리를 스치며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새 구두 신으셨다"고 웃으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천진한 소년의 얼굴 같기만 하고, 언젠가 제가 어릴 때, 서울 가셨던 아버지께서 저의 예쁜 꽃신(지금은 보 잘 것 없는 꽃고무신이지만)을 사주셨을 때 하도 좋아서 벗어들고 다니던 일이 생각나서 제 혼자 씩 웃었습니다.
정말 아닌 게 아니라 참 그 신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선생님! 인간의 욕심이란 한이 없나보죠. 안 계시는 줄 알고 그냥 그 거리거리를 제 혼자 걷기만을 생각하고 영주에 나왔는데 끝내 제가 전화를 걸었으니, 저도 어지간히 지조가 없는 가시나라고 할까요?
아무튼 대구에 감으로써 저의 생명은 많은 연장을 시켜 주었습니다. 오후엔 봉화엘 다녀왔습니다. '건강진단서' 때문에 말입니다. 벌써 의뢰했다는 '신원조회"'는 아직 봉화경찰서에서는 깜깜 무소식. 이젠 공부도 더 해야겠는데 스산한 마음과 육체는 나의 고통을 더해줄 뿐, 언제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1965. 11. 26. 밤에 뵈옵고 싶어 하는 정아가.
또 잔잔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립니다. 편찮으신 것을 보고도 여태 편지 한 장 못 드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 동안 육체적 고통 말끔히 가셨으리라 믿고 두서없는 글 드립니다. 사모님께서 안녕하시며 귀여운 아가들도 추위에 별일 없으신지요? 이곳 정이는 염려덕분에 죽지 않고 아직도 메마른 호흡을 계속합니다. 감사합니다.
정(情)이 폭폭 쏟아진다고 절 평하신 옛날과는 달리 내 마음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차갑게 변해 가는 모양은 나를 가끔씩 놀라게 합니다. 사물에 대한 반응도, 그 무엇에 대한 것도 귀찮고 생각하기 싫어짐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 걱정이 됩니다. 엄마의 성화에 문안편지를 드린다는 것이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었습니다. 참 2일 날 전보 해 주신 건 정말 반갑게 잘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 (학원생들)들은 다 합격이 되고 내 이름만이 없으니까 비웃는 줄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전보를 쳐주신 생각이 자꾸만 내 머리를 메워 쌉니다. 혹 이 생각이 맞아 들어갔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합격되었다면 정말 기쁩니다. 나보다 더 기뻐할 사람이 있기에 말입니다. 그 전보를 받던 날은 파리해진 내 손가락이 떨려 옴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교회로 간 저녁의 조용한 시간 이 소식을 들으려고 여태 안 죽고 고통스러운 호흡을 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잘 참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주일 동안(27일부터) 눈이 빠지도록 앓고 나니 더욱 이상합니다. 일주일은 꼬박 결근을 하고…
'회상다방'에는 언제 들렸는지요? 모퉁이까지 바래주신 그 이튿날은 하루 종일 '회상다방'에서 기다렸습니다. 아니, 기다렸다 기 보다는 그냥 앉아 있었다는 말이 더 실감 날겁니다. 나를 바람둥이(?)라던 권 선생을 기적적으로 '회상'에서 만나 몇 시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귀찮아서 죽을 것만 같던 난 억지로 나오는 데로 대답해 버리고…다방에 들러서 혹 제가 메모해 놓은 쪽지를 보셨는지요? 그 날은 꼭 마지막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꼭 뵙고 싶었는데 안 나오셨더군요. 더 편찮으시지 않은가 걱정이 들기보다 차가워진 내 마음이 살아야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만나야겠다는 집념이 꽉 차 있었습니다.
막차로 들어오는 내 발걸음은 처음 영주에 도착했을 때와는 정반대로 몹시도 무겁고. 극장만 없다면 다시는 영주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멀어지는 영주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꽁꽁 다짐을 하고, 그러나 지금은 또 그리운 추억들이 하나, 둘…혹 내가 선생님의 술에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내 얼굴, 파리한 내 꼴이 보기 싫어서 며칠을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며 출근을 위해 거울을 들었을 때는 그만 거울을 떨어트려 집안에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고…난 어쩌면 바람을 안고 오고 일으키는 계집애 같이 느껴집니다. 이런 복잡한 내 마음을 이해 못한 어머닌 선생님께 편지하지 않는다고 야단이 십니다. 배은망덕 한 계집애라고 여간 나무라시지 않았습니다. 왜 어머니의 그런 말씀이 나오시기 전에 전 편지를 드리지 못했을까요.
왜 이렇게 차가운 계집애로 돌아서야 했을까요? 처음 좋았듯이 끝까지 좋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을 알고 헤어질 때의 에티켓이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철통같이 믿어온 저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저의 조그만 한 인간 철학의 신조였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신념이기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이토록 나이가 들도록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깊이 사귀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처음을 왜 울며 돌아서야 하는지 참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님?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부름입니다. 이 사연 끝마칠 때까지 부르지 않기로 했었는데…선생님! 그리움이 아니 존경심이 미움으로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눈의 피해는 없으신지요? 그토록 좋아하던 눈. 어머니께서는 이제 정아 소원성취 되었다고 하셨지만, 노상 시무룩한 마음이었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눈도 생각 이외로 너무나 많이 쏟아져 명호보건지소에다 불쌍한 날 꼭 가두어 두어 며칠 동안 집에도 못 갔습니다. 어제(6일) 나와서 오늘은 못 들어갔습니다.
포근한 눈, 하얀 눈길을 밟기엔, 산야에 펼쳐진 그 눈을 감상하기엔, 내 마음이 너무 차디차게 얼어붙었는지 이번 눈은 내게 조금도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너무 추워 짜증만 나게 하고…
요사이도 약주 많이 드십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선생님 폭주하시는 거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 아무리 선생님이 제가 선생님을 미워한다고 말을 하셔도 이 부탁만은 꼭 들어주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선생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눈물이 나도록 빌겠습니다. 편지를 쓰는 것보다 안 쓰는 저의 마음이 더 아픕니다. 차라리 이렇게나마 되 갈기게 되니 한편으로 후련한 감도 듭니다.
머지않아 구정입니다. 시골에 가시겠네요. 정말 음력 새해엔 선생님의 먹은 뜻이 꼭 이루어지길 빌며 생각 내키는 대로 두서없이 갈긴 난필 용서바라며 안녕히 계십시오. 약주는 정말 부탁이에요. 아가들을 위해서라도… 친구를 만나면 술집에 들어가고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세병이 다섯 병이 되고 이런 분은 우리 아버지 한 분으로 족합니다. 술은 정말 싫어요. 저의 아버지께서 옛날에 술을 많이 잡수셔서 요사이 위병으로 편찮으셔요. 굉장한 고통을 당해요. 알고 있어요? 안녕.
1966. 1.11. 밤에 선생님이 미워하는 정
나의 선생님
오랜만에 문안드립니다. 그동안도 몸 건강히 안녕하셨습니까? 이곳 전 염려하여 주신 덕분에 잘 있습니다. 밤에는 고요한 물소리를 들으며…낮에는 붐비는 거리에서 발랄한 내 인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한 시골 학교와 교회 앞길을 매일 오르내립니다.
나의 선생님! 저의 집을 다녀가신 뒤 곧 바로 보낸 서신 받으셨는지요? 오지를 말아야하지만 몹시도 기다려지는 선생님이 언제 이곳엔 한 번 더 아니 오시는지요?
선생님! 며칠 전에는 기가 막히는 곳에를 갔었습니다. 바로 삼동(三洞)2리에 말입니다. 삼동초등학교 어린이들 BCG 접종을 하러 갔는데, 가는 길이 어찌나 험한지 아주 혼이 났습니다. 이곳에는 양지 바른 곳엔 눈을 찾아볼 수 없는데 어유, 어쩜 그렇게도 눈이 많이 쌓여있는지요? 그 이튿날 아침에는 코피가 나고, 다시 한 번 호박장군의 실력을 과시했답니다. 3일 밤을 그 마을에서 자고 13일 날 오후에 면사무소엘 도착하니 부면장님이 우스워 죽겠다는군요. 죽으러 갔다가 왔는지 어찌 얼굴이 그 모양이냐고요. 적지도 않던 눈이 더 커지고, 물렁죽 같다고 직원들의 핀잔을 받을 때 문득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 나에겐 멀고 먼 길이었지만 혼자서 오랫동안 사색하는 시간을 갖은 셈입니다. 낙동강 물을 껴안고 굽이쳐 흐르는 외딴 오솔길. 우거진 숲 속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감히 어디, 호…
선생님! 눈은 겹겹이 쌓였지만 스치는 바람결이 훈훈한 듯합니다. 벌써 봄이 온 것인가? 그 무섭던 동장군도 봄 처녀 앞에는 맥을 못 추는군요. 하기야 벌써 경칩까지 지났으니 봄이란 우리주변에 낯설게 생각되지는 않겠지요. 아무런 바람이 없이 소녀 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새삼스럽게 하늘 끝을 바라다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못 뵌 지 두 주일도 못 되었는데 한 달은 넘은 것 같습니다. 몹시도 뵈옵고 싶습니다. 이것이 아마 봄이 온 탓인지요?
문희가 몹시도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과 같이 본 '죽어도 못 잊어' 문희 주연의 영화 그녀의 발랄한 연기를 스크린을 통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문 광고엔 문희의 얼굴이 별로 안 나오더군요.
선생님! 19일 날엔 봉화에 나갑니다. 군청에서 교육이 있답니다. 20일까지 그러니까 2일간이죠. 시간이 있으면 전화라도 걸겠습니다. 그러나 혹 전화가 안 걸려 가드라도 화내시지는 마세요. 22일 날이나 23일 날 영주에 나가겠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것도 있고 그 동안 못 뵈온 걸 한꺼번에 보아야겠습니다. 철없는 가시나라고 너무 허물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옆에서는 그토록 잠꾸러기였는데, 왠지 잠이 오지 않는군요. 마음도 참 편했는데 지금은 편치 않습니다. 무언가 잊고 싶은 아쉬움을 잔뜩 남깁니다.
선생님! 나의 귀중한 선생님! 몸부림치도록 안타깝습니다. 술 많이 잡수시고 건강하십시오. 그럼 뵈올 때까지 이만 아듀를 드리겠습니다. 1966. 3. 15. 철없는 정아가
바람소리 물소리가 합창이 되어 들려오는 깊은 밤입니다. 헤어진 몇 시간 사이나마 안녕하셨습니까? 염려하여주신 덕분에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으며 집에서 자고 가라고 붙잡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막 버스로 명호보건지소에 도착했습니다. 며칠 동안 비워둔 방이라서 그런지 내 마음보다 더 싱그러움과 쓸쓸한 찬기가 참으로 서글픕니다.
지금은 깊은 밤, 아직 그래도 차 소리와 바람소리 사람들의 술 취해 흥얼대는 소리, 뒷골목 술집 아가씨들의 퇴색한 유행가 소리가 들릴 만도 합니다만, 오늘은 지극히 조용합니다. 간혹 매섭도록 몰아치는 바람소리와 낙동강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나의 숨소리…
어머니가 그토록 말씀하셨는데도 나는 왜 찬바람이 나는 이 방으로 돌아와야 하겠습니까. 어머니를 뵈려는 송구스러움 그대로의 약간의 입김이…정말입니다. 되도록, 아니 될 수 있는 한 나는 쓸어져 없어지려는 양심의 끈과 줄을 붙잡고 통곡을 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우울한 마음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괴로움은 나 스스로 창조하지 않겠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내 마음과 육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없이 반항하며 허우적거리며, 이성을 잃었던 지난날처럼 우정을 끊이지 않고 영원히 흐르게 하고 싶습니다.
부픗이 불고 무서울 정도로 불어난 강물, 황토 물, 그러다가 불이 꺼지는 듯 줄어든 그 주위의 황폐한 모습은 난 이제 다시 만들지 않겠습니다. 우정의 샘물이 오래오래 흐르게 하고 싶습니다. 맑고 청명하며 깨끗한, 선생님께 욕망의 만족을 드리지 못하고 주위를 떠나려는 저의 마음 이해해 주십시오. 그 그리움이란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있는, 끝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 선생님의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 속에 선생님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남은 이성을 찾고, 이런 글을 드리게 됨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요?
다방에서 학교 문제를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정말입니다. 공부를 해야 할 마음의 의욕도 서있지 않으면서 누가 뭐라면 휩싸여 들어갈 줏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지껄였습니다. 그러나 버리진 않겠습니다. 힘닿는데까지 알아 봐주시길 염치없이 또 부탁드립니다. 나는 머리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책의 내용을 다 읽고 나도 무엇을 말하였는지, 작가가 우리에게 어떤 뜻을 알리려고 하였는지 주제를 깨닫지 못하는 무능한 계집애가 되었습니다.
새봄부터 최대한의 내 의지를 되살려야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선생님을 만나면 희박해지는 내 마음이 참으로 얄밉습니다만, 안간힘을 쓰겠습니다. 사모님께 죄책감을 먼 훗날 보답 드리겠습니다. 전번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몹시도 불안해하며 심장이 극도로 약해져 있고, 신경이 몹시도 예민해져 있어서 지극히 조심하라는데 영향을 받는 것만은 아닌 줄 압니다.
나의 귀중한 선생님! 선생님이 그렇게 원하는 나를 후일 남편에게 바치고 남는 것은 선생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비루먹은 자국을 남기지 않고 웃으며 보람 있게 살고 싶습니다. 선생님도 나와 마찬가지일겁니다. 전 다 알고 있어요. 이 편지는 읽고 나신 후 불태워버려요.
옆에 계시기만 하면 정신없이 잠도 잘 오고 마음도 편안하고 밥맛도 기막히도록 좋아지는데 혼자 있으면 왜 밥맛이 없는지, 왜 이래야만 하는지…허리, 가슴의 고통이 참기 어렵습니다.
편지를 쓰다가 그만 잠이 드렸나 봐요. 12시가 되었을 때까지 뭔가 자꾸 끌쩍거렸는데 지금은 새벽 2시 반. 이제 맺음을 지으려고 합니다. 선생님! 조금 남은 양심을 몽땅 떨어가 주지 말길 거듭 부탁드리며 안녕히 계셔요. 눈물을 머금고 술 너무 많이 잡수시지 말아줘요. 1966. 4 .6. 새벽에 명호에서 정 드림
꼬마들이 손아귀가 벌어지도록 꺾어 오는 붉은 진달래가 몹시도 탐스럽습니다. 불의 입김이 대지 위를 완전히 덮었나 봐요. 청량산에 불꽃이 탄답니다, 아! 저 꽃 좀 봐요,
그 동안도 안녕하셨습니까? 사모님 안녕하시며 귀여운 아가들도 잘 자라겠지요? 저의 부모님도 여전하시고, 저도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참 잘 있습니다. 선생님! 요사이의 생활은 어떠하십니까? 화창한 봄날과 더불어 창창한 나날들이 되기를 빌겠으며, 아울러 술 잡수시고 밤늦도록 다니시는 일 요즈음도 계속하시는지요. 이 일을 언제나 염려하고 그러시지 말라고 부탁을(주제넘게) 드렸는데 얼마쯤이나 효과를 거두었는지요? 늘 귀찮은 소리라고 짜증스럽게 귀 넘어 들으셨겠지만, 너무 노여워만 마십시오. 지금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런 부탁드릴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지나친 노파심 때문일까요? 화창한 날에 창창한 일들을 하여 주십시오 또 부탁드려봅니다.
선생님! 뵌 지 꼭 보름만이군요. 뵈옵고 나서 한동안 짜증스러운 날들이 계속되더니, 또 다시 머리를 들고일어나는 얄밉도록 애한 그리운 마음. 그러나 지금은 아주 침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용기를 얻었다고 하면 좀 거추장스러운 표현이 아닐까요? 인간의 마지막 순간들까지 보람 있게 생활하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요? 비록 그 보람 있는 생활은 못했을지 망정, 그 마지막을 생각하는 그 순간, 순간들이 나에게 몹시도 커다란 희열을 안겨다 줍니다.
정말 선생님에 대한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들의 교육이 5월 중순경에 있다고 하니 그때 영주에 나가겠습니다. 요사인 종두, 디 피 티 등 많은 예방 접종이 나와서 벽지 학교를 찾아다니는 이동 출장 중이며 나대로 퍽 바쁜 나날들이 계속됩니다.
산골짜기마다 붉게 물든 진달래가 아름답습니다. 진달래가 피면 뻐꾹새는 왜 밤을 새워 우는지요. 명호에 부임한 처녀 여선생이 그냥 나가는 선생님이 없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 혼자 피식 웃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
1966년 4월 19일 정 드림
안집 꼬마들은 벌써 강변엘 가서, 한 아름의 진달래를 꺾어 왔습니다. 그런 대로 괜찮더군요. 낚시를 하는 중학생들이 물고기를 어찌나 잘 잡는지 한참을 넋 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더 큰 청년이 잡았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들고요. 붉은 진달래가 낙동강 주변을 멋있게 장식해 주었습니다. 강물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섰으니 나를 끌어 드리는 듯한 힘에 정신을 차리곤 했습니다. 특히 진달래를 한 가지라도 꺾었으면 편지 속에라도 동봉할 셈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산에 오를 자신이 영 없어요. 한 발자국도 더 옮기면 강물 속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을 것 같은 두려움이…왈칵 무서운 생각이 들어 뜀박질을 해서 먼 거리에서 강물을 바라보게끔 한 자리에 와 앉았어요.
수십 년 동안 물의 사나이에게 닳은 처녀 돌들은 퍽 깨끗하네요. 이 돌들도 나처럼 닳기 전에 모르는 통증을 느꼈는지요.
선생님! 이슬비가 내립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네 잎 클로버의 노래를 목청껏 뽑았지만 중도에서 하차, 영 기운이 없으니…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어느 어깨 패의 실패처럼 소녀의 마음들을 잘 담아오는 내 가슴엔 상처투성이, 끝없는 공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었는데, 그런 생각들은 하나도 일지 않습니다. 그저 멍청히 초점 잃은 눈동자에 눈물이 왈칵. 그래도 어제 밤 같은 날들이 몇 번 있어도 이번처럼 이렇게 넉 아웃되다 시피한 날은 정말 없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뒤에서 누가 정아! 하고 부름이 있는 듯 해 뒤돌아보곤 하는 어리석음도…가눌 수 없는 눈물을 딱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마침 날씨 탓인지 강가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어 내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선생님! 이대로 기운을 차릴 수 없다면 내 생애는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시계가 벌써 오후 2시를 넘었습니다. 어제는 이 시간쯤 선생님과 둘이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는데 아직 아침도 안 먹고 이렇게 앉아있으니 나는 영 미쳐있나 봅니다.
선생님! 너무 피곤한 듯합니다. 어쩌면 혹 마지막이나 아닐까하는 생각에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바위 위에서 편지를 쓰기로 했는데, 좀 쓰다 보니 비가 내려 그 뜻도 못 이루었습니다. 역시 이러고 보니 펜대 움직이기도 싫어졌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대로 날들이 계속된다면, 19일에 있는 교육도 모두 포기해야겠습니다.
선생님을 하루 속히 잊어버리도록 더 진한 화장과 예쁜 옷으로 겉모양을 내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오염된 냄새를 누가 맡는다면 두 번 다시 말도 걸지 않겠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1966년 5월 4일 정 드림
선생님께 드립니다.
아카시아 꽃 냄새를 맡기도 전에 벌써 낙화가 지는군요. 그 동안 몸 건강히 안녕하셨습니까? 마지막 한 장의 편지지가 남았기에 문득 필을 들었습니다. 보내주신 신문과 편지는 전번 주일날 잘 받았습니다. 편지 보내주시지 않아도 드리고 싶을 땐 미워해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너무나 오랜만에 잡아보는 펜이라서 그런지 글씨조차 내 마음대로 아니 되어 울고 싶습니다만, 많은 용서를 바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존경의 한계선에서 후퇴도 전진도 하고 싶지 않은 저의 마음, 어쩌면 이렇게도 외고집 불통인지 이번 일로 나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숱한 오고 간 언어들, 수많은 사연들, 가슴을 몹시도 때려주는군요. 마음이 너그러운 채 하면서 좀 내성적인 내 성질은 도시 명랑한 마음을 찾지 못해 미칠 지경이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이 깊고 달이 휘황 찬란히 비치는 강가입니다. 무서움이 내 전신을 엄습해 신을 벗어들고 미친년처럼 뛰어 오곤 하는 난 왜 이러면서까지 살아야 하는지요.
1966년 5월 26일 정아가 드림
(24일) 전 직원이 모두 도립공원 청량산 가을 소풍을 갔습니다. 너무 늦어 단풍이 바람결에 마구 휘날리더군요.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리보전', 퇴계 이황 선생이 수도한 '오산당', 최치원 선생의 '고운대', 김생이 글씨 공부를 완성한 '김생굴'을 가는 토끼 길 같은 낭떠러지의 좁은 오솔길에 떡갈나무, 참나무, 밤나무 등은 몇 개의 낙엽식물군이 숲을 이루어 자랑하는 듯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너무 늦게 가서 그 곱게 물든 단풍의 제 철을 구경 못해 약간 서운했으며 그날따라 날씨가 바람이 약간 일어서인지 걸어가는 토끼길 발등에 수없는 나뭇잎이 마구 떨어지더군요.
구르몽의 "나뭇잎이 저버린 숲으로 가자"가 연발 나올 정도로. 낙엽이 깔린 숲길을 걸으면서 같이 가자던 선생님 생각이 나서 가슴이 메더군요. 꼬마 김양의 "형아 왜 그리 얼굴이 해쓱하냐"는 핀잔을 받고 정신을 가다듬긴 하였습니다만,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너무나 마음이 아프더군요.
그 날 저녁부터 지금까지 다리가 아파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긴 합니다만,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으니 더 슬픕니다. 25일 선생님의 편지 잘 받았습니다. 몇 번이고 잘 읽어보고 꼼꼼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시 난 너무도 어리석은 철부지였나 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제 감당도 잘 하지 못하는 주제에 누구의 힘을 믿고 그리 까불거리는 건지 안타까움보다 두려움이 앞을 서기도 합니다.
이번 단풍놀이는 정말 자신이 없는데 여직원들이 나 안 가면 다 안 간다고 하기에 마지못해 따라 나셨습니다. 하긴 3명뿐인 여직원이라서 절로 재미가 있고 다정하기도 하죠.
선생님!
어디에서 어떻게 해도, 난 결코 선생님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날 내게 대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도 먼 길을 가면서도 갚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66. 10. 26. 새벽에 명호에서 서러운 꽃 정아 드림
안녕하셨습니까? 출장을 갔다가 돌아와 이 글을 드립니다. 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구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의 한없는 추억이 서린 인연이 있는 곳을 찾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저의 생각으로는 22일 날 10시 20분차로 떠나 23일 오후 2시에 도착하는 차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간적 여유가 어떠하신지 몰라도 전 22일은 꼭 10시 20분차를 타도록 노력하겠으며 만약의 경우 그전 차를 타면 연락하겠습니다. 22일 날 아침에 '회상다방'이나 어디에 전화를 주도록 하겠으며, 이 편지 받는 즉시 회답 바랍니다. 만약 연락 없으시면 제가 낸 시간에 의의가 없는 줄 알고 그날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알은 지가 벌써 3년 남짓. 그 동안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만 드렸고 은혜에 보답도 못 드렸으며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이제 내 마음의 결정을 내려 단 한번이라도 선생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떠나고 싶어 취한 행동입니다. 어떤 원한이나 복수심에 두려움을 느껴 이런 건 아닙니다. 여자들의 마음이란 그러면 그럴수록 어쩜 더 멀어집니다. 선생님! 전 단 한번이라도 선생님께 모든 걸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기로 마지막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항상 웃기를 좋아하던 내가 마음의 먹구름이 겹겹이 싸여 그늘 속에서 흐느적거렸습니다. 선생님! 이번은 저의 결심대로 하고 다음부터는 우리의 과거는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겠지요? 선생님! 저는 우리의 이 날을 위해 준비하겠습니다. 몸과, 마음을 드리는… 선생님! 나의 선생님!
1966. 11. 13. 명호에서 당신의 소녀 드림
마지막 필을 드립니다.
그 동안도 안녕하셨는지요? 저는 너무나 많이 염려해준 덕분에 잘 있습니다. 정말 그 동안 은혜 진일들 감사합니다. 마지막 대구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아파하지 말고 저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멀리 떠납니다. 미안합니다. 안녕.
1967년 4월 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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