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김영진 코오롱패션머티리얼 감사

입력 2015-09-11 01:00:05

"국방부 무기체계 연구비 연 1조원 넘어…지속적 감사 이뤄져야"

▷1954년 김천시 농소면 지좌동 출생 ▷대구 명덕초
▷1954년 김천시 농소면 지좌동 출생 ▷대구 명덕초'서울 중동중'대구 대건고 졸업 ▷육군사관학교 34기 ▷독일 칼스루헤대 도시행정학 석사 ▷경남대 국제정치학 박사 ▷감사원 공직감찰담당과장'사회복지감사국 1과장'지역민원조사단장'행정안보감사국장 ▷국토해양부 감사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상임감사위원 ▷대건고 재경 동창회장(현) ▷경남대 겸임교수(현) ▷코오롱패션머티리얼㈜ 감사(현)

김영진(60) 코오롱패션머티리얼㈜ 감사는 27년 동안 감사원에서 잔뼈가 굵은 '감사통'이다.

경북 김천의 산골에서 태어난 김 감사는 학창시절을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서울로, 다시 대구로 떠돌았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장교로 군인의 길을 걷다 장남으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에 군 생활을 중도에 접어야만 했다. 그는 생소한 분야인 감사원에 부감사관으로 특채된 이후 안주하지 않고 낮과 밤으로 감사의 이론과 실제를 공부하고 체득했다.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유학을 결심하고 독일로 향했다. 독일에서 남들보다 몇 갑절의 노력을 통해 2년 만에 도시행정학 석사학위를 따냈다. '굴러온 돌'이 아니라 '박힌 돌'로 감사분야 전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이었고, 노력은 결실로 이어졌다. 선배 감사관들로부터 '진돗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감사업무에 철두철미했다. 국토해양부 파견, 한국토지주택공사 상임감사 등을 통해서도 청렴도 제고와 경영 투명성 확보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국제개발협력을 통해 북한사회를 어떻게 개방으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박사논문을 낼 만큼 통일시대를 대비해 북한 개방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긍정적 사고방식, 소통의 리더십, 역지사지의 입장 등이 그의 삶의 모토다. 김 감사로부터 감사의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간 계기는.

▶대건고에 다닐 때 3년 동안 줄곧 반장을 했다. 3학년 때는 학내 연대장뿐 아니라 대구지역 고교연합 연대장까지 지낼 정도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육사도 이런 계기로 지원했다.

군 생활을 6년 이상 했지만, 장남으로서 어려운 집안형편을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군 복무를 끝내고 1984년 감사원에 사무관으로 들어갔다. 당시 유신 사무관제도가 있었다.

-감사원 초창기 근무는 어떠했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장교로 6년 7개월 복무한 뒤 감사원에 들어가 처음엔 애를 먹었다. 7급 직원을 비롯해 장장한 감사요원들에 비해 감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정부기관을 상대로 감사를 수행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관련 공부도 하고, 군대 '물'도 좀 빼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독일 유학을 결심한 뒤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밤마다 서울 남산의 괴테문화원과 종로 인근 독일어학원에서 독일어 등을 열심히 익혔다. 토'일요일을 포함해 2년간 열심히 준비했다. 공무원들이 독일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서울대 어학연구소의 위탁 검증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어학시험을 통과하고 아내와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책임감을 갖고 부지런히 한 결과 통상 5년가량 걸리는 석사학위를 2년 만에 따냈다.

-감사관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졌나.

▶철저하게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신조로 일했다.

특정 사안에 대한 감사를 맡으면 끝까지 파헤쳤다. 대충대충 하는 일이 없이 워낙 철저하게 파헤치는 바람에 '진돗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반면 감사과정에서는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배경을 파악했다. 상대방의 의견이나 입장을 충분히 들은 뒤 감사결과를 내놓으면 결과에 대한 승복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기억에 남거나 보람을 느낀 감사는.

▶사학 비리 감사와 군 무기체계 감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감사관 파견 시절에도 성과를 낸 것에 보람을 느낀다.

2006년 감사원 사회복지감사국 제1과장으로 있을 때 사학 비리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는데, 이때 감사반장으로 전국의 사립학교를 대상으로 대규모 감사를 벌였다. 당시 사학 비리를 낱낱이 파헤쳐 사학 운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를 통해 당시 감사원 전체 60여 개 과 가운데 업무실적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7년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로 파견간 뒤 상당한 역할을 했다. 당시 국토부가 다른 부처에 비해 직원 수가 많고 대형사업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비리문제가 종종 불거졌다. 하지만 '감찰정보상황 보고체계' 도입, '국토해양 고객만족도 제고방안' 시행 등 강력한 반부패 청렴 대책을 추진해 감사관으로 파견 간 지 약 5개월 만에 국민권익위원회 선정 우수 정부기관으로 상을 받는 성과를 냈다. 국토부 사상 청렴 부문의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군 무기체계 감사는 어떻게 이뤄졌나.

▶2010년 7월부터 1년간 감사원 행정안보감사국장을 지냈는데, 당시 군 무기체계 개선실태 등에 대한 감사를 몇 차례 벌였다. 행정안보감사국은 국방부, 법무부, 외교통상부 등 정부의 비경제부처와 입법'사법기관 등을 감사대상으로 총괄하는 국이다.

우리는 자주국방을 위해 국산 무기체계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무기체계의 국산화 비율은 미국의 60~70%에 불과하다. 전차, 자주포, 권총 등 전 분야에서 국산 무기체계 개발과 성능 향상, 개선이 필요한데, 여기에 대한 감사에 집중했다.

당시 무기체계 감사를 통해 한국형 전차의 자체 성능에 문제가 있어 개선하라는 감사를 했는데, 이후 후속조치가 되지 않았다. 성능에 문제가 있는데도, 성능검사 후 이상이 없는 것으로 합격처리해 보고한 것으로 후속감사결과 드러났다. 결국 부실한 조치와 대응으로 해당 참모가 징계를 받았고, 향후 문제가 된 전차의 성능은 개선된 것으로 안다.

천안함 사건 후속조치에 대한 감사도 벌여 책임을 묻고, 특히 해군 장비의 성능 개선 방향도 통보했다. 연간 30조원에 상당하는 국방예산 집행의 적정성과 유사시 군 대응능력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감사를 벌였다. 국방부의 무기체계 연구개선 예산만 연간 1조원 이상 투입되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한 감사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군 시절 소대장과 중대장, 연대 작전장교 경험이 군 관련 감사를 벌이는 데 도움이 됐다.

-감사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90년대 초반 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암행감찰을 벌였을 때 지역 철도청 공무원이 평일 골프를 치는 것을 적발한 적이 있었다. 당사자가 노조위원장이란 점 등으로 사회적 파문을 의식해 사직을 자청했으나, 집안 형편 등을 감안해 주의만 주고 수습했다. 지금 생각해도 잘 처리한 것 같다고 여겨진다.

-LH공사 상임감사로 어떤 역할을 했나.

▶토지공사와 주택공사가 합쳐져 어수선할 때 임명됐다. 전임 감사가 부패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상태여서 후임으로 갔다. 당시 LH공사가 안고 있는 빚 문제, 노조 분리 문제, 경영 난맥상 등 상당한 혼선이 빚어지고 있던 때였다. 2년 6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두 공사의 기능상 통합, 투명경영과 부채해결, 노조 문제 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조정'통합을 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대구경북이 타 지역에 비해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대구경북의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정치권, 경제계 등이 힘과 마음을 모아 발전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대구경북의 리더가 앞장서고 공무원과 시도민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앞으로 나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통일시대를 대비해 북한사회의 개혁'개방에 관심을 갖고 있다. 국제개발협력을 통해 북한사회를 어떻게 하면 개혁과 개방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베트남과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 성공적 역할을 한 공적개발원조(ODA)가 북한에 던지는 시사점'이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대학 내 연구소나 공익법인 등을 활용해 북한 관련 연구에 대한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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