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원폭 피해자 '70년 만의 승리'…'치료비 전액 지급' 승소한 이홍현 씨

입력 2015-09-10 01:00:08

"함께 싸운 2명 눈감아…日정부 사죄 아직 남아"

일본 정부와 4년간 긴 싸움 끝에 치료비 전액 지급 확정판결을 받은 원폭 피해자 이홍현 씨가 9일 오후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대구경북지부 사무실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일본 정부와 4년간 긴 싸움 끝에 치료비 전액 지급 확정판결을 받은 원폭 피해자 이홍현 씨가 9일 오후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대구경북지부 사무실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이홍현 씨의 부모.
이홍현 씨의 부모.

"막내인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국내 원폭 피해자들도 치료비 전액을 지급받도록 하는 판결을 이끌어 낸 이홍현(69) 씨. 9일 오후 대구시 중구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대구경북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사뭇 상기된 표정이었다. 쇄도하는 주변의 축하 전화와 인터뷰 요청, 8일 서울 국회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특별법' 제정 촉구 집회까지 마치고 돌아온 터라 지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씨는 "4년이 넘도록 긴 싸움을 치렀는데 이 정도로 지치지 않는다"며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한 덕분에 이 모든 싸움을 치러낼 수 있었다"며 웃었다.

이 씨는 원폭 피해자 가운데서도 가장 기운 넘치는 '막내'다. 1945년 8월 6일, 이 씨의 부모가 강제징용돼 히로시마에 살던 시절, 원폭이 떨어졌다. 이 씨를 임신했던 어머니는 원폭 분진에 노출됐고 이 씨(1946년 1월 6일생)는 태어나기도 전에 피폭자가 돼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원폭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혈압, 백반증에 시달렸고 어머니와 누나 모두 후유증을 겪다 세상을 떴다"고 말했다.

4년간의 긴 싸움은 '불공평'이라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됐다. 1983년 37세가 되던 때 정식으로 피폭 후유증을 인정받은 뒤 2008년 질병 치료차 히로시마에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병원에서 '피폭자원호법'(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을 설명한 책자를 보고 자국민에게는 지원되는 치료비가 재외 피폭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피폭 사실은 국적과 상관없이 동일한데 그중 일부에게만 의료비가 지급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며 "국내 수많은 피폭자들를 위해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긴 싸움을 예상한 그는 국내에 돌아와 자영업을 접고 소송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 나섰다. 전국 5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지부에 연락했지만 함께 나선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그는 "'안 될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라며 말렸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느냐는 생각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매달렸다"고 말했다.

의지를 다졌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소송을 함께 제기했던 나머지 두 피해자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는 "생존자로서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피폭 유족 2명과 더 의지를 불태웠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매 순간 위기가 닥쳤지만 희망은 있었다. 일본 내에서 이 씨에게 진심 어린 도움을 준 이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한국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회' 이치바 준코 회장과 30명의 변호인단이다. 이 씨는 "그분들은 나보다 더 한국과 일본을 많이 오가며 자료 수집 등을 도왔다"며 "이분들 덕분에 정신적으로 의지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지를 갖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저를 지켜보는 2천600여 명의 전국 원폭 피해자 때문"이라며 "한 명의 어머니, 한 명의 누나라도 더 적극적으로 치료받고 관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고 말했다.

이 씨는 여전히 피폭 후유증과 싸우고 있다. 주기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한다. 하지만 신체적 아픔보다 피폭자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은 더 고달프다고 했다. 그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우리 정부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정부가 제대로 된 피해자 실태 조사에 나서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이끌어내는 외교적 노력을 다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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