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삼국유사 골든벨

입력 2015-09-10 01:00:08

'온 산하가 다 불타 없어지더라도 이 비만은 홀로 남고 글은 전해지기를'.

경북 군위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에는 삼국유사를 남긴 보각국사 일연(一然'1206~1289)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 위 글은 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4천50자 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충렬왕의 명으로 당대 문장가(민지)가 지은 글을 7년에 걸쳐 왕희지체 글자를 모아 1295년 세운, 보물 제428호 보각국사비다.

그러나 해외까지 소문난 왕희지체의 비를 탐한 속인의 무분별한 탁본과 임진란 등 전란과 세월에 비는 부서지고 없어졌다. 비의 조각에 남아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불과 300여 자. 민간 서지 전문가(박영돈)와 대학교수 등의 노력과 국내외 30여 가지 탁본을 수집해 겨우 비를 복원했다. 2006년, 스님 탄생 800돌 때다.

이제 국보 삼국유사의 가치를 모를 국민은 없다. 스님의 84년 생애 후반기에 완성한 삼국유사는 조선조 경주에서 찍은 것이 지금 전하지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승려나 소수 지식인 학자를 빼면 외면받았다. 조선은 불교를 누른 유교 나라였던 탓이다. 그렇게 삼국유사는 잊혔다.

일본은 식민지배 전부터 관심을 쏟았고 대학 교재로 연구도 했다. 조선 패망 뒤 우리 지식인은 각성했다. 마침내 1927년 최남선은 삼국유사 해제본을 냈고 본격적인 관심이 시작됐다. 그는 "'삼국유사'는 어느 의미로 말하면 조선 상대(上代)를 혼자 담당하는 문헌" "'삼국유사'는 조선 고대사의 원천"이라 극찬했다. 하지만 해제본은 한글 번역 책이 아니어서 대중의 접근은 힘들었다.

한글 번역은 광복 이듬해(1946년)에 이뤄졌다. 비로소 대중화의 첫 걸음마를 뗀 셈이다. 이후 10여 종의 번역본과 수천 편의 논문 등이 쏟아졌다. 한때 방송사 추천 도서가 되면서 수십만 부가 팔리는 등 '삼국유사 신드롬'이 일어났다. 비문의 바람처럼 '홀로 남아 전해지길' 바라던 비도 옛 모습은 아니지만 드디어 되살아났다.

게다가 삼국유사의 생명력은 더해가고 있다. 군위군의 '삼국유사 골든벨'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서다. 특히 골든벨은 2009년부터 시작, 최근 끝난 7회까지 전국 고교생 4천132명이 참가했다. 매년 전국 수십 개 고교 학생 500~600명이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찾아 스님과 삼국유사를 기억하는 셈이다.

한국 미래와 역사를 짊어질 이들의 열정은 식지 않을 것이다. '온 산하가 다 불타 없어지더라도 비와 삼국유사, 스님은 영원히 남아 후세에 전해질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