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체념과 달관

입력 2015-09-07 01:00:05

지난주 9월 모의고사에 출제된 정훈의 가사 '탄궁가'(嘆窮歌)는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함께 그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읽어 보면 가난한 살림에 봄이 되어 씨앗을 뿌리려고 보니 볍씨 한 말은 반이나 쥐가 먹었고, 기장, 피, 조, 팥은 겨우 서너 되 남아서 춥고 배고픈 식구들이 먹고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자기는 멀건 국물을 먹으면서, 종들에게는 건더기를 먹여 가며 힘써 일해보자고 하니 종들은 무시하고 콧방귀를 뀐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지난해 꾼 환곡을 갚을 길도 막막한데다 세금으로 낼 공물을 마련할 길도 없다. 기제사는 다가오는데 제사 음식도 없고, 원근 친척들을 대접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지긋지긋한 가난 귀신에게 탄식을 한다.

좋은 날 좋은 때에 사방으로 가라하니

떠들고 화를 내며 원망하며 하는 말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희로애락을 함께하여

죽거나 살거나 이별할 줄이 없었거늘

어디 가서 누구 말 듣고 가라고 말하는가?

우는 듯 꾸짖는 듯 여러 가지로 꾸짖거늘

도리어 생각하니 네 말도 다 옳도다.

무정한 세상은 다 나를 버렸는데

너 혼자 믿음이 있어 나를 아니 버렸거든

일부러 의절하고 잔꾀로 이별하겠느냐?

하늘이 만들어준 이 내 가난 설마한들 어찌하리?

가난도 내 분수니 서러워하여 무엇하리.

여기에서 보면 그렇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화자가 가난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유를 가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우리 고전에서는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를 국문학자들은 '체념과 달관'이라는 말로 설명을 한다.

체념한다는 것은 사전적으로 보면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는 것'이다. 사람이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삶의 목적이 없는, 죽은 것과 같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상당수는 집착하는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집착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리는 것으로,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든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승진하는 것에만 매달리느라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승진이 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승진하는 것 말고도 세상에는 훨씬 더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헛된 희망을 체념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을 벗어난 차원 높은 인생관을 의미하는 '달관'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진학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가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 부부싸움까지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럴 땐 대책 없이 자식만 많이 낳고서도 '다 자기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나는 거야.'라고 하시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체념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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