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나라는 누가 지키나

입력 2015-09-03 01:00:05

"집에는 별일 없지요." 지난달 말 군 복무 중인 아들의 전화가 왔다. 아들은 지난달 4일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사태가 빚어진 육군 1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근무 중이다.

"그래, 우리야 뭐 별일 있을 게 있나. 전화할 수 있나." "(아들) 그냥 걱정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힘들지. 옷도 못 갈아입고. 군화는 벗나. 남북이 만나 회담하는 것 보니 며칠 내로 비상이 풀릴 것 같다. 긴장 늦추지 말고 부하들 잘 챙겨라."

아들은 "이거 장난 아니다. 정신없다"면서도 다시 집 걱정을 했다. "민간인 걱정은 하지 말고, 사고 나지 않도록 부하 관리에 신경 쓰라"며 통화를 끝냈다.

그놈 난리통에 그래도 집 걱정부터 한다고 대견해 해야 하나. 아니다. 아들은 처음 경험하는 위기에 스스로 집 걱정을 하며 마음을 달랜 것이다. 어쩌면 군 복무를 권유하고 군 시절 얘기를 들려준 아비에게 잠시나마 위로받으려고 했을까. 제 엄마와 자주 연락해도 아비와는 거리감이 있었던 아들이었기에 몸과 마음이 꽤 고달팠을 것으로 짐작이 갔다.

기자는 1980년대 중반 힘들게 군 복무를 했다. 중부전선 최북단 6사단 수색대대에서 소대 통신병을 맡았다. 이번 북한의 목함지뢰 매설과 포 사격으로 온 국민에게 알려진 비무장지대에서 수색과 매복 작전을 하고, 지뢰를 캐면서 군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당시 박살선 공사(우리 GP 후방과 군사분계선 사이에 추진철책을 세우는 일)에 동원돼 지뢰를 캐는 통로 개척 작업을 했다. 추진철책을 세울 자리를 드라이버로 일일이 찔러 지뢰를 찾아 제거하는 일이다. 그곳에는 지뢰탐지기로 찾을 수 없는 지뢰가 널려 있어 긴 드라이버의 끝을 갈아 지뢰를 찾았다.

공사 과정에서 사고는 일반화된 일이었다. 지금이야 군부대 사고가 뉴스로 알려지지만, 그때는 한마디로 개죽음이었다. 비무장지대에 들어갈 때마다 생명수당을 줬지만, 푼돈을 받고자 그곳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젊음의 패기와 국가관, 아무나 못 가는 곳에 들어간다는 자부심 등이 뒷받침되지 않았을까.

이런 경험으로 기자는 이번에 1사단 수색대대 병사들이 추진철책의 통문에서 북이 매설한 지뢰에 사고를 당했다는 국방부의 발표를 접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북한이 우리 장병을 죽이려고 지뢰를 묻은 일은 1960년대 이후 없던 일로, 천안함 폭침 사태 이상으로 놀라운 도발이었다. 우리 정부로서는 국가의 운명을 걸고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당시 김일성 정권의 북한은 비무장지대에서 이번처럼 날뛰지 않았다. 우리는 최고의 경계수준으로 각종 작전에 임했지만, 그들은 러닝 차림에 비무장으로 북측 GP 인근에서 작업하곤 했다. 우리의 박살선 공사 때도 지뢰 매설을 한 것 같은 장난을 쳐 긴장시켰지만, 죽이려고 한 행위는 없었다.

그런데 3대 세습을 하는 김정은 체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는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대북 확성기 방송만 해도 기자의 군 시절에는 서로 재미삼아 듣는 수준이었다. 퀴즈 맞히기 등 북한의 대남방송을 꽤 재미있게 들었고, 민주화의 물결이 거셀 때 우리 방송에서 나오지 않는 뉴스도 접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동안 경제적 차이만큼이나 이념적으로 북한이 많이 나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남북의 대치가 원만하게 풀렸지만, 비무장지대에서의 총성은 전쟁을 의미한다. 세계적인 화약고인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우리 군이 북한보다 분명히 강하지만, 전쟁은 남북에 회복 불능의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강한 군대와 국민의 단결로 전쟁 억지(抑止)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국민은 이번에 군에 전적으로 신뢰감을 보내며 성원했다. 나라는 군인이 지킨다. 구호나 말장난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 북한의 지뢰 도발로 사고를 당한 1사단 장병에게 '전진', 나의 청춘을 바친 6사단 수색대대원에게 '필승', 북의 도발에 의연히 맞선 국군통수권자에게 '충성'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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