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12>금오산이 낳은 여류 명창 박록주

입력 2015-09-02 01:00:07

소설가 김유정 애태운 천상의 소리꾼

금오산이 낳은 여류 명창 박록주는 세상을 뜨기 1년 전까지도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매일신문DB
금오산이 낳은 여류 명창 박록주는 세상을 뜨기 1년 전까지도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매일신문DB
명창 박록주 기념비 옆에는 놀이터와 쉼터, 식수 시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식 장소로 찾는 곳이다. 인근에 가서 물으면 나이 많은 노인도 금방 록주 기념비 위치를 알려줄 만큼 잘 알려져 있다. 조두진 기자
명창 박록주 기념비 옆에는 놀이터와 쉼터, 식수 시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식 장소로 찾는 곳이다. 인근에 가서 물으면 나이 많은 노인도 금방 록주 기념비 위치를 알려줄 만큼 잘 알려져 있다. 조두진 기자
명창 박록주의 젊은 시절 모습.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소리를 시작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 덕분에 록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소리꾼이 되었다. 매일신문 DB
명창 박록주의 젊은 시절 모습.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소리를 시작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 덕분에 록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소리꾼이 되었다. 매일신문 DB
소설가 김유정. 박록주보다 연하였던 김유정은 록주를 사랑한다며
소설가 김유정. 박록주보다 연하였던 김유정은 록주를 사랑한다며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매일신문 DB

한국의 대표 소리꾼 박록주(朴綠珠, 1905년 2월 28일~1979년 5월 26일)는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에서 태어났다. 록주는 예명이고, 본명은 명이(命伊)다. 열두 살 되던 해, 당시 전국을 유랑하며 각지의 명창을 상대로 소리를 가르치던 절세의 소리꾼 박기홍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열여덟 살 때 명창 송만갑에게 소리를 사사했다. 순회창극단 협률사(協律社)에서 활약하다가 남원에서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김창환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정정렬에게서 '춘향가'를 배웠다. 박록주는 명문법통 소리를 두루 익힌 정통 소리꾼이자 자신만의 소리 세계를 창조한 명창이다.

◆소리 좋아하던 아버지 영향받아

박록주의 아버지는 한량으로 노래를 좋아했다. 농사짓는 집안이었으나 농사를 나 몰라라 했고, 어머니가 전적으로 집안일을 감당했다. 록주는 '어린 시절 나도 어머니를 거들어 집안일을 많이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노래를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토막소리를 배우면서 록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노래하는 어린 록주를 보면서 마을 사람들은 가던 발걸음과 하던 일손을 멈추고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박록주가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한 것은 열두 살 때인 1916년이다. 당시 전국 순회공연을 하던 창극단체 협률사가 선산으로 공연을 왔고, 공연을 본 아버지는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딸을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때마침 절세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박기홍이 선산 해평의 도리사 부근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딸을 그에게 보내 소리를 배우게 했다.

◆가선(歌仙) 박기홍의 음악과 정신 승계

박기홍은 당시 절세의 명창으로 가신(歌神) 혹은 가선(歌仙)이라고 불렸다. 일찍이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예인으로서 자부심도 대단했다.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후배 소리꾼들이 명품 판소리를 변질시키기라도 하면, '통속화했다'며, 호되게 꾸짖었다. 그런가 하면 인사 오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긴 선산 군수가 박기홍을 불러 트집을 잡으려고 노래를 시켰다가 박기홍의 '적벽가' 호통 소리에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망신을 당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처럼 대쪽 같은 사람에게 엄격하게 배운 덕분에 박록주는 바른 소리는 물론이고 예술가의 올곧은 정신도 배울 수 있었다. 록주가 훗날 한국의 대표적 소리꾼으로, 또 우리나라 소리 교육의 밑거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박기홍의 영향이 컸다.

◆전국적 인기, 김유정 짝사랑 뿌리쳐

박록주는 박기홍에게 배운 뒤 김천'왜관'상주 등의 잔칫집에 불려다닐 만큼 유명한 소리꾼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18년(14세) 선산에 공연 차 들른 김창환의 협률사에 합류해 전국 공연을 다니면서 단가와 토막소리를 배웠다. 대구의 유명한 기생 양성기관이었던 달성권번에서 춤, 시조, 소리, 육자배기, 화초사거리를 익혔다.

이때부터 대구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으며, 1923년 서울에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의 '사랑가'에서부터 '십장가'를 배웠다.

1923년 서울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서울에서도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남권번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음반 취입을 시작했고, 콜롬비아, 빅타, 시에론, 다이헤이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또한 1926년 9월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에 처음으로 출연한 이래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했다.

1928년 '봄봄'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의 집착에 가까운 구애를 받았으나 끝내 뿌리쳤다. 박록주보다 3살 연하였던 김유정은 혈서를 써서 전하거나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박록주가 나가는 요정 앞에 나타나 밤새워 기다리기도 했다. 김유정은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거요. 당신이 내 사랑을 버리겠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라는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는 반말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록주는 1934년 순천의 갑부 김종익과 살림을 차렸고, 그해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이 무렵 창극 춘향전, 흥보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편시춘, 옹고집전, 어촌야화, 장화홍련전 등에 출연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군 위문공연…후학 양성도

박록주는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조선창극단에서, 1946년부터는 국악원 산하 단체인 국극사(國劇社)에서 활동했다. 1948년에는 30여 명의 여류 명창들과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옥중화' '햇님 달님'과 같은 창극을 무대에 올렸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오태석'신숙'이용배'조농옥'김세준'한농선 등 30여 명과 국민방위대에 입대해 1952년 초까지 위문공연을 다녔다. 그러던 중에 1952년 3월 눈병이 발생해 한쪽 시력을 잃었다. 1953년에도 강태홍'박춘흥'박연자'박병두'한영순'나경애 등 40여 명과 함께 위문공연을 다녔다.

박록주의 유랑극단 생활은 1960년 초 급성폐렴으로 끝난다. 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부터는 서울국악예술학교에 나가는 등 제자 양성에 힘썼다. 이 무렵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3년 11월 5일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가 됐다. 1971년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했고, 초대회장을 맡아 판소리 발전에 기여했다.

박록주는 1978년 고향인 선산공연을 마지막으로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노년에 자주 불렀던 노래는 '백발가'였으며, 마지막 공연에서 부른 노래 역시 '백발가'였다.

◆화사하지 않으나 그윽한 향기

박록주는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각종 유성기 음반(SP)과 LP 음반에 남긴 그녀의 목소리는 화사하지 않으나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다.

'흥보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흥보가'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심청가, 춘향가 등을 비롯해 '소상팔경' '강산유람' '초한가' '만고강산' '적벽가' '숙영낭자전' 등 많은 노래를 남겼다. 박기홍, 송만갑, 김창환, 김정문 등 당대 거장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그들의 노래색이 깃들어 있다.

박록주는 판소리 창법에 대해 "판소리는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말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며 큰길, 좁은 길, 험한 길, 고부라진 길을 거쳐 가야 한다. 가는 도중 오르막과 절경을 만났을 때 쉬어가듯이, 몇몇 뛰어난 대목에 한해서만 기교를 부리되 나머지에서는 부채를 펴들고 초연하게 걷는 선비처럼 (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진중한 선비가 아무 곳에서나 행장을 풀지 않듯이 묵직하게 노래했던 것이다.

박록주는 동편제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창법을 고집했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잔가락 없이 선 굵게 쳐나갔던 것이다. 그녀는 진중하게, 쇠망치로 내리치듯이 소리를 호령했는데, 굽이지고 어둡고 좁은 골목까지 샅샅이 살피는 서편제와 다른 소리를 추구했다.

덕분에 그녀의 소리는 얼핏 들으면 건조하고 투박하지만 담백하고 깊은맛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는 그녀의 타고난 남성적 성음과 동편제 창법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내심 있는 흉내 내기로 새로운 창조

박록주는 재주가 뛰어난 명창이었지만 자신의 재주를 믿고 함부로 자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이 서른이 되자 창을 소화하면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마흔이 지나자 기교가 목청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타고난 재주가 있었고, 12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워, 당대 최고 명창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지만, 박록주가 자신의 성량에 맞는 소리로, 더 나은 소리를 새로 정립하기 시작한 것은 40대 후반∼50대 초반부터다. '흥보가'의 박타령과 비단타령은 그녀의 성량이 더욱 드러나도록 새롭게 짠 소리다.

박록주는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를 배웠지만, 김창환의 '제비노정기'와 박록주의 '제비노정기'는 차이가 상당하다. 김창환의 소리가 부드럽고 밋밋한 느낌을 준다면, 박록주의 소리는 강하고 박진감 있는 느낌을 준다. 박록주가 소리의 리듬, 소리 맺는 법, 발성, 사설 등에서 자신의 색깔을 더했기 때문이다.

박록주는 '흥보가'를 비롯해 수많은 소리를 불렀지만 그중에서 '백발가'와 '흥보가'의 '제비노정기', '박타령', '비단타령'을 즐겨 불렀다. 자신의 스타일로 새롭게 짠 만큼 다른 대목보다 빼어나게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시는 구미가 낳은 명창 박록주의 예술 업적과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박록주 전국국악대전'을 열고 있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이한 '박록주 국악대전'은 선생이 생전에 국악 발전과 후진 양성에 힘썼듯, 우리나라 미래 국악을 이끌어갈 국악인 등용문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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