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구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박종근 전 국회의원

입력 2015-08-14 06:48:17

"대구경북 백년대계 위해…DGIST 고급인재 산실로 거듭나야"

▷1937년 경북 상주 출생 ▷대구 수창초교
▷1937년 경북 상주 출생 ▷대구 수창초교'대륜중'경북고 졸업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워싱턴주립대 국제경제학 석사 ▷조흥은행 ▷경제기획원 외자계약심의관'경제기획관'예산심의관 ▷국가안전기획부 경제정책실장 ▷금성사 전무 ▷대경컴퓨터 회장 ▷15~18대 국회의원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대구유치특위 위원장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현)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했다. 허리는 꼿꼿했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에너지 복지 확충에 애쓰고 있는 박종근(78) 전 국회의원. 그는 60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초교 졸업 뒤 큰형이 하숙하던 서울로 무작정 올라갔던 얘기, 중학교 2학년 때 군용 열차를 타고 피란했던 얘기, 경제기획원 시절, 4선 의원을 하면서 대구를 위해 쏟은 열정 등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부품하지만, 사실과 다르지도 않았다. 박 전 의원의 삶의 역정과 대구에 대한 단상을 들어봤다.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대대로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살았는데, 태어난 곳은 아버지가 상주군청 공무원을 할 당시여서 상주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먹고살 만했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큰형이 하숙을 하던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형이 서울대 공대에 다니고 있던 터라 열심히 공부해 같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서울 보성중에 들어가 2학년에 올라가던 해 6'25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 치하에서 별 하는 일도 없이 그해 여름을 다 보냈다. 국군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수복했지만, 다시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바람에 이듬해 1'4후퇴로 서울은 난리였다. 매서운 겨울, 형과 함께 군용 피란열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다.

전쟁 중에도 집에서는 학교를 다니도록 했다. 당시 대구 경북여고 맞은편 언덕에 천막을 쳐놓고 가르치던 '연합중학교'가 있었다. 어디에서 피란을 왔든 다니던 학교 모자와 배지만 보여주면 됐다. 천막학교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3학년 때 대륜중으로 전학했다.

-공직에 몸담게 된 계기는.

▶상과대 졸업 후 조흥은행에 입행했다. 1961년 서울 광화문 조흥은행 신탁부에서 연수 시절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빌린 돈을 갚을 것을 독려하는 일을 했는데, 큰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5'16이 일어났다. 사무실 옆이 국회였는데, 군이 점령하는 등 엄중한 상황이었다. 이즈음 정부가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직원 채용을 하는 공고를 보게 됐다. 공직에서 더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응시했다. 이후 경제기획원 관료로 잔뼈가 굵었다.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통치기구인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의해 경제기획원에서 나왔다. 이유도 없이 쫓겨났기 때문에 다시 복직하기 위해 해직 공무원 복직투쟁위원회 부위원장까지 맡았다.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조카라는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노태우정부 들어 안전기획부로 발탁됐다.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의 경제특보 역할을 했다. 안기부장이 대통령에게 경제 관련 문제를 브리핑할 때 경제 보좌관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주요 경제 쟁점은 경부고속철도 및 인천국제공항 건설 여부였다. 당시의 경제 이슈를 그 나름대로 정리해 리포트로 제출했다.

-4선 국회의원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일은.

▶대구의 핵심 인프라를 갖추는 데 나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DGIST) 설립을 주도한 것을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대구도시철도 예산을 대폭 반영하고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데 일조한 것 등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2005년 국회 예결특위 야당 간사를 하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밀고 당기면서 대구도시철도 2호선 건설 예산 1천억원을 반영하던 때가 잊히지 않는다. 당시 예산안 통과를 앞두고 여당이 대구도시철도 예산 1천억원 반영은 어렵다고 했다. 새벽 3시까지 버텼다. 결국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새벽 3시 넘어 찾아와 설득했고, 새벽 4시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대구 공무원들이 모두 환호했었다.

-또 다른 성과는.

▶2006년 말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대구 유치특위 위원장을 맡아 이 대회의 대구 유치에 힘을 쏟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대구 방문을 주선하는 등 2011년 대구 대회를 이끌어내는 데 역할을 했다. 또 대구 월드컵경기장 옆 육상진흥센터 건립 예산 반영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전국적으로 유망한 육상선수를 육성하는 등 국제육상도시로서의 대구 브랜드를 높일 수 있는 밑바탕을 깔았다고 자부한다.

-DGIST 설립에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은.

▶2003년 김만제 전 국회의원과 대구경북 발전 방안을 논의하다 대만의 첨단 공업단지인 신주공업단지 얘기가 나왔다. 대만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이 단지는 대만의 성장동력이었다. 의기투합해 직접 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설계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비롯해 370여 개의 첨단기업이 입주, 대만 전체 정보기술(IT)산업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첨단 공업단지와 미국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해 그해 말 DGIST 설립법안을 만들었다.

-현재의 DGIST 기능을 어떻게 평가하나.

▶DGIST는 당초 미국 실리콘밸리와 대만을 모델로 교육, 연구개발(R&D), 벤처 비즈니스 등 삼위일체를 목표로 세웠다. 하지만 대구시의 관심 부족과 DGIST의 역량 미흡 등으로 현재 교육 기능 외에 R&D와 벤처 비즈니스 기능이 전무한 상태다.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화실을 갖춰 놓았는데,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대구경북의 고급 인재를 키우는 일류대학으로, 동양에서 주목받는 기관으로 양성해야 한다.

DGIST 관계자들은 비전과 사업계획을 세우고, 대구시가 이를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돕고, 지역 정치인들은 관련 예산을 따 내는 구도가 돼야 한다.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앞으로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어떻게 끌고나가고,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 발전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10년의 마스트플랜을 만들어 그에 따른 투자를 하고, 좋은 인재를 영입해야 한다.

-한국에너지재단은 무슨 일을 하나.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만성질환자가 있으면서 총가구소득의 10% 이상을 에너지 구입에 사용하는 '에너지 빈곤가구'가 전국적으로 150만 가구나 된다. 에너지의 공적 기능 강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의해 기관이 만들어졌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에너지 복지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2006년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에너지 복지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역할을 한다. 취약계층에 대한 창호'단열공사 등 에너지 효율화 사업을 통해 에너지 비용을 줄여주고, 난방연료나 전기요금을 지원하는 것 등이 주요 업무다.

-경제 전문가로서 한국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나.

▶경제의 성장동력이 많이 떨어졌다. 중국도 주가가 급락하는 등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중국과 우리는 다르다. 중국은 성장동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침체 현상이지만, 우리는 장기적인 전망이 밝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당초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3% 후반에서 4%까지 전망했다 3% 초반대로 바꿨지만, 실제로는 3%대에도 못 미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왜 경제성장이 안 되는지 그 핵심요인을 찾아내야 한다. 특히 어떤 산업을 통해 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이냐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

-대구 발전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대구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가 우리 경제의 청사진을 그려내야 한다면, 대구는 대구의 성장동력과 주력 육성산업을 찾아내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또 기존의 인프라를 잘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DGIST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대구경북의 과제다. 대구경북의 백년대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육상진흥센터와 같은 인프라도 발전 및 활용 방안을 찾지 않으면 애물단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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