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 발복 안될라" 입향조 묘 석물 없어
김천의 문중 이야기에서 다룰 마지막 문중은 화순 최씨(和順 崔氏) 문중(門中)이다. 화순 최씨 문중은 고려 중기 전라도 안렴사를 지냈던 최세기(崔世基)를 시조로 한다. 김천에 입향해 문중을 일으킨 이는 최원지(崔元之)다. 화순 최씨 김천 입향조 최원지가 하로마을에 터를 잡은 사연과 사모바위에 관한 전설을 따라가 보자.
◆고려가 망하자 낙향한 최원지, 하로마을에 터를 잡다
화순 최씨는 고려 중기 항몽전쟁 때 전라도 안렴사로 공을 세워 오산군(烏山君)에 봉군된 최세기를 시조로 하고 평장사(平章事) 최계(崔桂)를 중시조로 한다. 오산은 화순(和順)의 옛 지명으로 최세기가 전남 화순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화순으로 삼았다.
김천의 화순 최씨는 해주목사를 지낸 4세(世) 최영유(崔永濡)의 아들인 최원지가 고려말 안렴사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처의 고향인 현 김천시 양천동에 있는 하로마을에 입향했다. 5세 최원지가 입향한 후 그의 2남 최자하(崔自河)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3남 최자강(崔自江)의 후손이 문정공파(文貞公派)를 이루어 정착했다.
2남인 최자하의 후손은 부정공파로 조마면 신안리, 아포읍 예리, 농소면 봉곡리, 부항면 대야리, 감천면 도평리로 이주했다. 또 3남인 최자강의 후손은 문정공파로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에 정착한 이래 구성면 송죽리'하강리'양각리, 대항면 대성리'복전리, 대덕면 연화리, 어모면 중왕리, 봉산면 태평리, 지례면 여배리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화순 최씨 김천 입향조 최원지의 묘는 '누에나방이 벽에 붙어 있는 형상'을 한 비아부벽형(飛蛾附壁形) 명당이라고 알려졌다. 최원지의 묘는 김천시 양각면 먹방골에 자리 잡고 있다. 최씨 문중에서는 이 묘에 석물을 설치하지 않는다. 석물을 설치하지 않는 이유는 최원지의 묘가 누에나방이 벽에 붙어 있는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석물을 설치할 경우, 나비의 날개를 짓눌러 발복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가로 발돋움하다
화순 최씨 문중에는 이 명당의 발복으로 최원지의 세 아들을 비롯해 7세 최선복(崔善復)이 대사성, 최선문(崔善門)이 공조판서, 8세 최한후(崔漢候)가 대사간, 도승지를 지냈고, 9세 최한보(崔漢補)는 대사성, 최중홍(崔重洪)은 형조참의, 개성유수에 오르는 등 32명의 후손이 전부 관직에 출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최원지가 입향한 후 화순 최씨는 김천을 대표하는 사대부가의 하나로 발돋움하며 조선 전기까지 누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르는 역사적인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
최원지가 입향한 김천시 양천동에 있는 화순 최씨 세거지 하로(賀老)마을은 김천을 대표하는 반촌 중의 하나다.
하로라는 이름은 고려 말에 금산(金山'김천의 옛 지명) 안렴사(按廉使'고려시대 지방의 장관)였던 최원지가 고려가 망하자 고성산 아래에 있는 구암사(耉岩寺)로 낙향한 후, 그의 세 아들과 손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최원지를 하례받은 노인이라 하여 하로라고 존칭한 이후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당나라의 여지시랑 하지장(賀知章)이 늙어 벼슬에서 물러날 때, 왕이 감호일곡(甘湖一曲)을 준 데서 연유해 하지장의 옛일에서 따다가 하로라 했다고도 전한다.
이처럼 하로마을은 화순 최씨 입향조 최원지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일구었고 이후 벽진 이씨와 연안 이씨 등이 함께 살게 됐다.
하로마을과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의 전설도 흥미롭다. 김천시 양천동 중리마을에서 동쪽 산 너머 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아랫고개인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하로(賀老)의 지세가 매우 좋아 장차 큰 인재가 나서 중국을 괴롭힐 것을 염려해 이 고개를 끊어 하로의 정기(精氣)를 꺾어 버렸다고 전한다.
◆남애정
김천 조마면 신안4리 외신마을 뒤 기산(箕山) 아래에 위치한 남애정은 화순 최씨 22세손으로 학문이 출중했던 남애(南厓) 최창락(崔昌洛)을 기리기 위해 1913년 제자들과 지역 유림들이 건립했다. 최창락의 호를 따서 남애정이라 이름 지었으며, 이재기(李在基)가 상량문을 지었다. 1970년대 개보수를 했다.
남애정은 재실과 누마루가 결합된 형태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다. 좌측의 방은 전면에 동일한 크기의 출입문을 2개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우측의 누마루는 툇마루보다 높게 설치했고 정면과 측면으로 계자(鷄子) 난간을 둘렀다. 정자 측면과 후면에 돌출된 툇마루를 설치했다. 누마루 하단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으며 지붕은 청기와로 팔작지붕이다.
남애정은 정자와 재실이 결합된 독특한 누마루 형태의 건축물로 20세기 초 정자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김천 신현일 기자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시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
품천사집(品川史集)
금릉지(金陵誌) (금릉지편찬회, 1963)
화순 최씨 대동세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동현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고문
최원덕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회장
최원봉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부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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