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돌 대한민국…성공신화에서 깨어나 참회하라"
김진현 이사장, 그는 한국의 지성이다. 특별히 그렇게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사람이나 일, 그리고 현상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를 다시 큰 틀에서 통합하는 능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이나 그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조봉암 선생 모두 어느 부분에는 긍정적이고 어느 부분에는 부정적이다. 이 부분들을 나누어서 정리한 후 이를 다시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하여 우리의 역사를 말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당연히 이념이든 진영이든 어느 한쪽에 머물지 않는다. 늘 열린 마음으로 나누어서 보고 다시 통합하는 일을 계속한다. 그래서 팔순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그는 늘 새롭다. 진영논리와 패거리 문화가 판을 치고, 적당히 그 가운데 서겠다는 기회주의적 중도론이 난무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그에게 지난 70년 역사와 앞으로 길을 물었다. '도착적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참회'를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동아일보 논설주간, 과학기술처 장관, 한국경제신문 회장, 문화일보 회장, 서울시립대 총장, 울산과기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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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광복의 역사
김병준: 광복, 우리가 했다고 할 수 있나?
김진현: 폴란드는 독일 치하에 있으면서도 2만5천 명이 2차 대전에 참여해 독일과 싸웠다. 우리 역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비중이 작았다. 국제법상의 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광복은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다준 것이 된다.
김병준: 우리 스스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김진현: 꼭 그렇게 생각할 이유 없다. 민족적 저항이 어느 민족보다 강했다. 또 독립선언서와 3'1운동, 그리고 신간회 운동이나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의 역사교육을 봐라. 민족의 주체성과 비폭력 평화주의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독립에 기여를 했다. 해방과 광복에 우리의 주체성이 있다. 자긍심 가져도 된다.
김병준: 그러나 결국 우리가 주도하지 못했고, 그 결과 해방이 된 뒤로도 동서냉전 체제 아래 친일 인사들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김진현: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전쟁 전에는 일제강점기 때의 관료들을 차관 이상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그 바람에 별 자격 없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달라졌다. 국가발전이라는 목표와 반공이념이 민족문제에 우선하게 되었다. 그러고 싶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김병준: 그 바람에 친일하던 사람이 득세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처벌받기도 했다. 우리 민족사의 원죄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정의의 관념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김진현: 일제강점기 때 경찰서장 하던 사람이 내무장관이 되기도 했다. 반면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선고를 받기는 했지만 조봉암 선생 같은 분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김병준: 그런 분들이 적지 않다.
김진현: 정정화 여사의 를 봐라. 독립운동가의 며느리로, 또 아내로 중국에 건너가 죽을 고생을 했다. 국내로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었으나 바로 김구파로 몰려 고생을 했고, 전쟁통에 남편은 납북되고 자신은 부역을 했다 하여 옥살이를 했다. 남편을 북에 두고 옥살이까지 한 여인, 그 이후의 인생이 어떠했겠는가?
김병준: 다시 한 번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김진현: 이제 이만큼 살게 되었다. 이렇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성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데 대한 생각 없이 돈 벌었다고 대대손손 물리기나 하고, 좀 배웠다고 힘이나 주고 다니고…. 이래서는 안 된다.
◇도착적 근대화
김병준: 그래도 지난 70년, 성공적이라 해야 하지 않나?
김진현: 숫자상으로 위대한 성취를 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민주화에 있어서도 그렇다. 1972년 프리덤 하우스가 민주화지수를 처음 내 놓았을 때 우리의 시민자유도는 6등급, 아래로부터 두 번째 등급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1, 2등급을 오르내린다. 다른 후발 국가들이 다 그런 것 아니다. 우리만 그렇다.
김병준: 하지만 성공의 그림자도 짙다. 민주화만 해도 어딘가 불안하다. 자유스러운 건 좋은데 그 가운데 진영논리가 판을 치고 패거리 싸움이 일상이 되고 있다. 노사분쟁 등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도 심하다.
김진현: 바로 그 점이다. 민주주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되는 것은 단지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의 안전과 생존, 그리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부분, 즉 생존과 안전 그리고 평화의 문제와 잘 연계되지 않고 있다.
김병준: 그 내재적 가치나 목적과 유리되어 있다는 말 아니냐?
김진현: 그렇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선거를 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민주적 거버넌스 역량을 키우고 이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는 일 등은 저 뒤로 가 있다. 그 결과 국가의 거버넌스 역량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줄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김병준: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부분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김진현: 성장도 무엇을 위한 성장이냐를 분명히 해 왔어야 했다. 재벌 위주의 성장정책을 썼다 하더라도 그 목표가 재벌 잘살게 하자는 게 아니지 않느냐.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그 지배구조와 공정거래 질서, 그리고 사회 전체에서의 배분구조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했다. 이런 데 대한 합의나 전략이 분명치 않다 보니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다.
김병준: 과도한 경제력 집중, 극단적인 양극화, 이중적 노동시장 구조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나.
김진현: 그뿐만 아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이 험해지고 어려워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최고의 자살률과 낙태율, 또 높은 사회적 불신에 가족 이기주의 등 '도착적 근대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신생아 수의 35%에 이르는 낙태율만 해도 그렇다.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이게 이렇게 높을 수 있나? 도착적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김병준: 왜 이렇게 되었나?
김진현: 이른 시간에 압축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익스트림 리액셔니즘(extreme reactionism), 즉 무엇에건 과도하고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우리 특유의 행동양식도 영향을 미쳤다.
김병준: 과도하게, 또 극단적으로 반응한다?
김진현: 근대화와 민주화도 1등, 낙태율과 자살률도 1등, 도시화와 교육열도 1등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속도도 빠르다. 어찌 보면 극단의 반동성이 우리의 삶이었다. 어떤 일이든 일단 옳다고 생각하면 좀처럼 그 이면을 보지 않는 유교적 명분론, 뭐든 시작하면 빨리 끝을 내야 하는 조급증, 또 '이것 아니면 저것' 하는 식의 단선적 사고 등이 그 원인이다.
◇참회, 그리고 집단적 리더십
김병준: 광복 70주년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김진현: 성공 신화에서 깨어나야 한다. 박정희 신화나 김대중 신화에 갇혀 있어서도 안 된다. 세상은 변했다. 또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성장의 발판이 되었던 저임금 구조는 더 이상 우리의 힘이 될 수 없고, 우리를 이끌었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더 이상 잘 나타나지도, 잘 작동하지도 않는다.
김병준: 모든 것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 아닌가?
김진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성공의 이면, 즉 도착적 근대화와 같은 잘못된 부분들을 봐야 한다. 또 우리 모두 공범임을 인식하고 참회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역할이 컸던 만큼 잘못도 많을 수 있다. 나 역시 장관도 지내고 했으니 죄가 없을 수 없다. 모두 참회해야 한다.
김병준: 어떻게 참회하나? 스스로 그 잘못을 느끼면 되는 것인가?
김진현: 이 자리에서 더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방법은 많다. 이를테면 일종의 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과오를 신고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른 면책과 인센티브를 주는 방법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재계와 정치권 인사들부터 그렇게 할 수 있다.
김병준: 꼭 신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최소한 상대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그래서 더 큰 과오를 범하는 일은 줄어들 것 같다.
김진현: 어쨌든 이런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새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새사람들이 집단적 리더십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김병준: 왜 집단적 리더십인가?
김진현: 이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수환 같은 지도자나 영웅은 없다. 사회 구조상 나오기도 힘이 든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그러한 요소들을 고치게 해야 한다. 또 새로운 시대를 열고 이끌어 나가게 해야 한다.
김병준: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나.
김진현: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정말 뛰어나다. 박인비 선수나 가수 싸이를 봐라. 과거에는 봉건제도와 가부장적 권위, 그리고 권위주의에 묶여 그 역량이 다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한껏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이것을 국가적 에너지로 모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다.
김병준: 결국은 정치가 잘 되어야 할 것 같다.
김진현: 넘버원 과제이다. 지금까지는 남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따라갈 모델도 없다. 그만큼 힘들고, 그래서 참회를 한 집단지성으로서의 집단적 리더십을 말하는 것이다.
김병준: 참회는커녕 서로 삿대질만 하고 있다. 결국은 국민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도리밖에 없다. 아무튼 이 문제는 또 다른 과제다. 이쯤에서 정리하자. 오히려 일본을 오랫동안 연구해 오셨으니 일본에 대해 하나 묻고 싶다. 우경화가 계속되고 있는 일본, 우리에게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김진현: 일본은 기본적으로 복종문화가 강하다. 개인적 역량이 잘 발휘되기도 힘들고, 민주주의를 하기도 힘든 나라이다. 젊은 시절 하버드에 머물 때 일본 연구의 대가인 라이샤워 교수가 개인적으로 해 준 말이기도 하다. 우리 정치가 제대로 되어 우리 국민의 개인적 역량을 제대로 엮을 수만 있다면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김병준: 그래도 큰 나라이다. 경제력이 비교가 안 된다. 또 군사력도 조만간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커질 전망이다.
김진현: 이스라엘과 같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중동에서 살아남는지를 봐라. 비대칭적 힘, 즉 남이 가지지 않은 기술과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그들이 가지는 힘을 그대로 가지겠다면 우리는 실패한다. 기본적인 방어 역량과 함께 그들이 가지지 않는 비대칭적 힘을 가져야 한다.
김병준: 어떤 힘이 있을 수 있나?
김진현: 북한이 소니픽처스를 해킹했을 때 미국이 북한을 해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이 아닌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있다. 보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해서 아시아의 모범 국가가 되는 것은 어떨까? 이 역시 중국 일본은 잘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비대칭적 힘으로 주변국들을 견제할 수 있을 때 통일도 가능하다. 앞으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김병준: 도착적 근대화와 그에 대한 참회, 그리고 비대칭적 힘을 말씀하셨다. 좋은 말씀 감사하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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