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国)이었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설국'의 첫 문장이다. 눈으로 뒤덮인 일본 북부 온천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일본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관심이 단지 일본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인 무용가 최승희의 강렬한 춤에 매료되었고, 서정적인 조선민요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일본에 흘러든 조선 여성의 비극적 삶에 연민을 느꼈다.
식민지 시기 동안 조선의 아름다운 예술과 비극적 역사에 마음을 둔 일본 예술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만은 아니었다. 1920년대 일본 문화계에서는 조선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저명한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는 일본 유명잡지에 조선 백자 등 조선 미술을 찬미하는 여러 편의 글을 연재했다. 그리고 당대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는 김소운이라는 조선인이 들고 온 조선민요에 감동받아 일본 시인들에게 조선민요를 소개하고, 김소운의 민요집 발간을 도왔다. 1920년대 일본의 예술가들은 급속한 서구적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잃어버린 전통적 정서를 유지하고 있는 정신의 고향으로서 조선을 수용하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조선인 여성을 다룬 두 편의 소설 '조선인'(朝鮮人, 1925)과 '사자의 서'(死者의 書, 1928)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두 편의 소설에는 이제 겨우 10대 중반을 넘어선 조선인 소녀들이 등장한다. 소녀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매춘으로 생활하고 있다. 소설 속 소녀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능숙하지 않은 일본어로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목 놓아 운다. 그러나 돌아갈 뱃삯조차 없는 그녀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소녀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애처로운 조선민요는 소녀들이 처한 운명의 비극성을 한층 더 극화시킨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조선민요의 애잔한 가사와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소녀들의 비극적 운명을 연결시켜 식민지 조선의 슬픈 운명을 소설로 표현하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조선이 단지 '애처로운' 운명의 주인공으로만 수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희'(1951)라는 소설에서 1934년 일본에서 공연된 조선인 무용가 최승희의 춤을 두고 "조선 민족의 반역과 격분이 무언의 춤을 통해서 느껴졌으며, 더듬거리는 듯한, 몸부림치는 듯한, 투박하면서, 격렬한 춤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일본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조선, 조선민족, 조선문화를 섬세하면서 연약한가 하면 굽히지 않는 강인함과 격렬함의 이중적 면모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일본과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비행기로 2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심리적 거리는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멀다. 그 심리적 거리는 식민지 시기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일본과 한국 간에, 지난 역사에 대한 사과와 용서의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식민지 시기라는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식민지 시기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한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조선, 조선민족, 조선문화에 대해 지녔던 이해와 애정을 2015년의 일본과 한국 모두 한 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혜영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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