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시대의 아픈 이바구<1>-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입력 2015-08-07 01:00:00

3세 때 부모와 떨어져…밤이면 외로워 할머니 젖 만지며 잠자리

삽화: 이영철 화가
삽화: 이영철 화가

1. 입학

6월의 하늘은 맑았다. 쳐다보니 푸른 하늘에는 온통 하얀 공 천지가 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전국의 국민학교 전 학생에게 고무공을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남학생에게 준 것은 야구공만 했고, 여학생에게 준 것은 그것보다 큰 공이었다. 나는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똑같이 공을 받았다. 난생 처음 만져보는 하얀 공이 하도 좋아 공부시간에도 계속 만지작거렸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모두 운동장에 나가 공을 하늘 높이 던졌다.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하늘로 던진 공은 하늘을 온통 하얗게 물들여 놓았다. 나도 하늘로 힘껏 던졌다. 공이 땅에 떨어지자 탄력을 받아 몇 번을 퉁기더니 다른 아이들 공과 뒤섞여 어느 공이 내 공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공에 제 이름을 적어 넣을 겨를도 없이 하늘로 높이 던져 보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나는 아무 공이나 주었으나 그때마다 다른 아이가 제 것이라고 빼앗아 갔다. 나는 키도 작고 마음도 약해 내 것이라고 우길만한 주제가 되질 못했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교실로 들어갔으나 그 공 생각 때문에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아 있는데 담임 우에노 마사코(上野正子) 선생은 눈물이 글썽한 나를 유심히 보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일본말로 하는 말이지만 느낌으로 대충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왜 그래?"

나는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며 아래위로 흔들었다.

"공을 잃은 게로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자상한 담임선생의 손짓과 표정으로 대충 그 뜻을 이해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영리했던지 몸짓으로라도 표현을 잘해 누구보다 의사소통이 원활했다. 그래서 우에노 선생은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선생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위로의 말을 했다.

"괜찮아, 내가 하나 구해 줄께."

공부는 3시간만 했다.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우에노 선생은 직원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공을 하나 주는 게 아닌가. 나는 하도 기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공을 두 손으로 꼭 쥐고는 집으로 달려 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공을 만져보며 무척 신기해했다. 나는 왜 이 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드리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의 설명은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몰라 할아버지께 설명을 해드릴 수가 없었다. 나도 그 공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싱가포르를 함락하여 전승의 기쁨을 조선 식민지에까지 나누는 기념품이라는 것을 2학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싱가포르가 일본군에 함락되기는 내가 입학하기 몇 달 전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농사짓기에 바쁘고, 신문을 받아보거나 라디오로 새 소식을 듣는 집은 없으니 상세한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

김천으로 가는 신작로 네거리에 있는 소비조합에서 큰 라디오를 동네 사람들이 듣기 좋게 밖에다 설치해 놓고 있어서 이문동 사람들은 그 방송으로 세상일을 대충 알게 된다. 또 동장이 동사 앞에 놓아둔 살평상 위에 신문을 펴놓고 상세히 설명을 해주어 새로운 소식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된다.

1942년 2월 15일에 일본군은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싱가포르를 함락했다. 당시 일본군은 말레이반도 남단 싱가포르를 공략했는데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 싱가포르 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 지휘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3만여 명의 군사로 영국군 및 영연방군 지휘관 아서 퍼시발 중장의 10만 군사들을 물리치고,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 영국의 퍼시발 사령관은 항복 조건을 협상하였고, 야마시타 사령관은 영국군의 무조건 항복을 고집했다. 결국 무조건 항복을 승낙 받고야 말았다.

이때 야마시타 사령관이 퍼시발 사령관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유명한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퍼시발 장군! 무조건 항복하시오. 예스냐 노냐, 둘 중에 하나만 답하시오."

어린 우리들도 상대방에게 가부를 강요할 때 예스냐 노냐라는 말을 많이 써먹었다.

도조 총리는 전쟁에 이긴 제1차 승전축하식을 거국적으로 열었다. 그는 라디오에 등장하여 국민에게 호소했다.

"여기 제1차 승전축하식에 즈음하여 삼가 성수의 만세를 축하드립니다. 천지도 요동치라고 창화를 부탁합니다. 천황폐하 만세, 만세, 만세."

전국의 국민들도 라디오 앞에서 만세를 삼창했다. 천황은 백마를 타고 궁성 앞 니주바시(이중교 二重橋) 위에 서서 국민의 만세 소리에 거수의 예로 답했다.

일본 국민들은 열광했다. 문자 그대로 전승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우리 동네 농민들에게는 이 흥분이 전달되지 못하고 다만 영국 사령관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았다는 소문만 나돌아 겨우 알게 되었다.

나는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댁에서 컸다. 선산면에는 학교가 하나밖에 없고 지원자는 많아 입학시험이 매우 어려웠다. 시험 보는 날도 할아버지 등에 업혀갔다. 시험 내용은 종이를 동그랗게, 또는 삼각형이나 사각형으로 오려 놓고 그것을 오려낸 자리에 갖다 맞추는 것이었다. 다음은 평형대 위를 걸어가게 하는 중심잡기 시험이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쉽게 합격을 했다. 동네 아이들의 반이 떨어졌다. 떨어져도 슬퍼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월사금을 낼 돈이 없어 집에서는 잘 되었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나는 입학식 날에도 할아버지 등에 업혀갔다. 1학년 2반에 배정되었다. 담임선생은 18살쯤 되어 보이는 일본 여선생이었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일본서 막 건너온 초임선생이었다. 그는 사범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며, 일본말을 이해시키려고 온갖 몸짓을 다해 성의껏 가르쳤다.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었는데 일주일 간격으로 교대했다. 오후반으로 바뀔 때는 점심을 먹고 오라는 신호로 사이렌 소리를 내고는 손짓으로 그후에 오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오에 울리는 주재소 사이렌을 오포 분다고 했는데 그것은 옛날, 정오에 대포를 쏘아 시간을 알린 데서 유래했다.

나는 담임인 우에노 선생이 참 좋았다. 얼굴도 예뻤지만 무릎까지 오는 짧은 치마,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교실에서도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녔는데 슬리퍼 대신으로 뒤꿈치를 접어신고 다니는 것까지 다 보기 좋았다. 다음 주부터 오후반이라고 등교 시간을 알리는데 '앵-'하고 사이렌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선생님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에노 선생은 내 옷이 남루하고 키도 제일 작았지만 자기를 유심히 쳐다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귀여웠던지 다른 아이들보다 더 관심을 가져주었다. 특히 총기가 있어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동그란 얼굴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 것 같다.

교실의 이런 따뜻한 분위기와는 달리 일본 정부는 한국의 모든 국민에게 말과 글자를 빼앗고, 일본말을 쓰게 했을 뿐 아니라 성과 이름까지 바꾸도록 했다. 내 이름도 니시하라 히로시(西原 弘)가 되었다. 나는 왜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른지를 몰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본은 한국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일본과 한데 묶으려는 흉계를 꾸미고, 이것을 강압적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우리 학교 이름도 내가 학교에 입하기 한 해 전에 선주공립국민학교가 되었다. 어른들은 여전히 소학교라고도 하고 보통학교라고도 했다. 국민학교는 일본 천황의 백성 즉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한다는 뜻에서 국자와 민자를 따서 부른 것이다.

우에노 선생은 모범 교사였다.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아이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생활지도도 인간애를 중시했다. 한국 농촌의 헐벗은 아이들과 무식한 학부모들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가르쳤다. 그는 열여덟의 초임 교사로 식민지 교육의 때가 묻지 않은 천진무구한 교사였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다. 동녘에 뜨는 해를 보고 대충 시간을 짐작하여 학교에 갔다. 동무들이 집 앞을 지나가면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면 동행을 했다. 그것이 공동 등교 시간이다. 비가 오거나 구름이 많이 낀 날은 해 시계가 없으니 지각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옆 반에서는 지각생에게 가하는 체벌이나, 복도에 세워 놓은 아이들이 많았는데 우에노 선생 반은 조용했다. 늦게 교실에 들어오는 아이들을 일일이 머리에 손을 얹고 좀 더 일찍 오라고 타이르기만 했다. 그는 일본에서 자라며 일본 학교의 일상생활에 익숙하여 조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개 패듯 마구잡이로 대하는 데 적이 놀랐다. 그는 비인간적 식민지 교육이 사범학교에서 배운 교육 이론과 차이가 나는데 적응하질 못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이나 가정생활의 열악함을 직접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아파하고 슬퍼했다. 집집이 시계가 없다는 것도,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도, 먼 곳에 있는 우물 하나로 동네 사람들이 물동이로 날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난 뒤에는 얼굴도 씻지 못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오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었다. 시계가 없어 지각하는 아이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공책도 아주 헐한 갱지였고, 옷은 남루하여 거지나 별 차이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책가방을 메고 오는 아이는 한두 사람뿐 모두 밀가루 포대를 잘라 만든 보자기가 책보였다. 신발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매월 학교에 내는 월사금을 제때에 마련하지 못하여 학교를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우에노 선생은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그가 하는 일본 말은 아주 쉽게 모든 동작을 다 동원하지만 아이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도 자신이 조선말을 모르는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2학기에 들어서자 국어책도 잘 읽고, 일상용어도 듣기뿐 아니라 발표도 제법 잘 하는 데 그도 신이 났다.

국어책에는 히로시(弘)군과 다로(太郞)군이 씨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서로 용을 쓰다가 히로시가 애석하게 지고 마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내 일본 이름이 히로시이므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동무들도 그것을 가지고 나를 요와무시(약한 벌레)라고 놀려댔다.

하루는 우에노 선생이 우리집으로 가정 방문을 왔다. 아직까지 일본 선생이고, 조선 선생이고 가정 방문을 온 일이 없었는데 우리 동네에 느닷없이 일본 선생이 나타나자 야단이 났다. 우에노 선생이 보이자 이문동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리집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마당에서 마중했다. 할머니는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서 선생님에게 허리를 굽히며 연신 고맙다는 말만 했다. 우에노 선생은 할머니에게 무어라 다정스럽게 말을 하는데 할머니는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어라 칭찬을 하는 것 같은데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착하고 공부를 잘 한다는 뜻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이, 하이."

할머니는 예, 예 하는 일본말로 연신 허리를 굽히며 아는 채를 했다. 우에노 선생은 집안을 한번 훑어보더니 공손히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같은 반에 있는 종수 집과 조환이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들에 나가고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일본 여 선생, 참 이뿌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아주 공손하네."

"아이들도 참 잘 가르친다 카던데, 때리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은 칼 찬 일본 순사만 보다가 그렇게 예쁘고 얌전한 일본 선생을 보고 적이 놀라워했다. 그리고 일본 사람도 조선 사람에게 온순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학기를 마치고 통신부(通信簿)가 나왔다. 학부모 이름 난에는 할아버지 성함이 적혀 있었다. 니시하라 일권(西原日權). 성은 온 가족이 다 바뀌게 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일권이라는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성적은 10점 만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 성적은 평균이 9점이었다. 글자는 한문으로 구(九)라고 쓰여 있었다. 연도는 일본 천황 연호로 쇼와(昭和) 1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석차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선생이 나에게 우리 반에서 일등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이 많은 상급생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부 잘 한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들까지 어떻게 내 성적을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우에는 선생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부끄러운 생각이 앞섰다. 집안에 젊은 여자가 없고 어머니와 떨어져 살다보니 젊고 아름다운 여 선생이 누나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했다. 담임선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래서 학교 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 되었다.

2 (이별)

나는 세 살 들면서 선산에 계시는 할아버지 댁으로 왔다고 했다. 내가 언제 부모와 헤어져 할아버지 댁으로 옮겼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모와 떨어질 때 반항을 했다거나, 울며불며 어머니 치마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선산 군청이 있는 선산면에서 삼십 리나 떨어진 구미면에 살고 있었다. 집이 워낙 가난하여 삼형제 중 맏이인 아버지만 선산소학교에 보내고, 그 밑에 두 동생은 아예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막내가 불쌍했던지 나중에 이십 리나 떨어진 시골 간이학교에 입학시켜 새벽밥을 먹이고 자전거로 통학을 하게 했다. 간이학교는 2년제로 졸업을 하고 난 뒤 정규 소학교 3학년에 편입학 할 수 있었다. 막내는 간이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그만 두었다. 돈이 없어서였다.

맏이는 공부를 잘 했고, 인물도 형제 중에서는 뛰어나 대전철도국에서 시행한 철도국원 시험에 합격했다. 첫 발령이 구미역이었다. 직명은 역수(驛手)였지만 직위는 고원(雇員)이었다.

할아버지는 워낙 가난하여 방 한 칸을 세 들어 살면서 땅 한 마지기 소작도 못 얻어 아무 물건이나 난전을 펴서 장사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맏이는 인물도 좋을 뿐 아니라 뚜렷한 직업을 가진 청년이 되었으므로 연봉리 과수 할머니 눈에 들어 그 집 사위가 되었다. 과수 할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화 중 하나가 재미있다.

"오늘 밥 먹었나?"

"예 금밥 먹었습니다."

"그래? 맛이 좋았겠구나."

할머니는 그의 집이 가난하여 쌀밥은커녕 죽이라도 먹었겠나 싶어 그냥 물어본 건데 노란 색의 조밥 먹은 것을 금밥이라 했으니 얼마나 기특한 느낌이 들었겠는가. 할머니는 혼인을 시키면서 조그만 집 한 채와 새잣골 논 서 마지기를 넘겨주었다.

어머니가 19세 되던 해, 내가 태어나고 3년 뒤에 여동생이 태어나자 선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할아버지가 나를 데려갔다. 할아버지는 동생이 났으니 키우기가 힘들겠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인질로 빼앗아간 거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는 잘난 아들 덕택에 집과 땅을 얻었으나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언제나 부족했다. 자연히 큰 아들의 월급을 넘보게 되었고 나는 중간에서 돈 걱정의 좋은 구실거리가 되었다. 사돈으로부터 받은 조그만 초가집은 방 한 칸, 부엌 하나 그리고 소 마구간이 전부였다. 작은 아버지 둘은 밤마다 아는 집을 찾아가서 자고 들어왔다. 훗날 작은 아버지가 혼인을 했을 때는 방 한 칸을 달아서 방이 두 칸으로 불어났다. 그동안 좁은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거처하였으니 그 불편함이 오죽했겠는가.

방안에는 옷장도 없이 막대 두 개를 걸친 선반에 이불과 베개를 얹고, 옷은 벽에 대못질을 하여 주렁주렁 걸어놓고 지냈다. 사소한 물건들은 마구간 뒤에 붙은 헛간에 모두 들여놓았다.

내가 너무 어려서 할아버지 댁으로 왔기 때문에 밤이면 외로움을 타서 할머니의 한쪽 젖은 물고, 한쪽 젖을 만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젖을 만져야 안심이 되는 버릇은 7살까지 계속되다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그 버릇이 그쳤다. 잠자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누웠지만 꼭 할머니 쪽으로 누워 할머니 품속에서 젖을 쥐고 잤다.

나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를 때 할머니 품으로 왔으니 할머니로 만족했고, 어머니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에 나가면 혼자 방문에 기대서서 두 분이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혼자 기다리다가 너무 적적해오면 무섬이 뒤따라와 나를 울먹이게 했다. 울다가울다가 눈물이 나지 않으면 그저 노래처럼 엉엉 소리만 냈다. 저 멀리 동쪽 하늘에 비행기가 천천히 떠오면 잠시 울음을 잊고 그것을 쳐다보다가 비행기가 서쪽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다시 울던 생각이 나서 또 울었다.

어느새 할머니가 집에 오면 얼룩고양이가 된 나의 얼굴을 치마폭으로 닦아주고 슬픔에 겨워 껄떡이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어릴 때의 밤은 길고 무서웠다. 밤이 되면 모정이 그리웠던지 할머니 가슴을 더 파고들어 선잠을 자기도 했다. 할머니의 가슴은 병아리를 지키는 어미닭의 깃이요, 모든 근심을 쫓아버리는 낙원이었다.

사월 초파일 큰 절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절로 갔다. 꽃송이처럼 총총 늘어 달린 초롱 사이에서 할머니는 수없이 절을 하고 내 이름으로 초롱도 하나 달아, 당신의 맏손자가 무병장수하기를 빌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솜사탕을 하나 사 주면 나는 너무 좋아 깡충 걸음을 하였고, 솜사탕은 먹는 맛보다 들고 다니는 자랑이 더 즐거웠다.

어머니는 가끔 돈이나 양식을 들고 시집에 오지만 나를 마음껏 안고 정을 나눌 수가 없었다. 어른 앞에서 아이를 안고 어르는 일은 불손한 행동으로 여겼고, 없는 살림이지만 할아버지의 영은 엄했다. 어쩌다 시부모가 들에 나가고 없을 때 혼자 집에 있는 어린 나를 보면 얼른 나를 안고 눈물부터 흘렸지만 나는 엄마에 대한 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때 할머니가 집에 들어오시면 나는 할머니에게 쫓아가 매달렸다. 엄마는 내 행동이 무척 서운했지만 시부모 앞이라 태연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 사이에 준비해 둔 술상 앞에 앉아 위엄에 찬 훈계만 늘어놓았다.

"자식을 품안에 주리 끼고만 있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정만 줄 것이 아니라 엄하게 자립심을 길러 주어야 하느니라."

한번은 그 장황한 훈계 앞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보였다가 술상이 마당으로 날아갔다.

"내가 네 자식을 섧게 한 적이 있느냐! 왜 질질 짜노. 그렇게 서럽거든 당장 데려가거라."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셔요."

어머니는 꿇어앉아 백배 사죄했다.

할머니는 마당에 나뒹굴어진 깨진 술 사발과 부러진 상다리를 수습하면서 중얼거린다.

"죽도록 키워도 공도 없다. 쯧쯧쯧."

그 일이 있고부터는 아예 나를 안아볼 생각도 못했다. 계비가 왕자 대하듯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연봉리 친정으로 내려갔다. 친정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탓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외할머니도 사돈의 성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꾸 캐묻는 것이 딸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그동안 묻어두었던 속내를 풀어놓았다. 사돈이 술만 취하면 내려와서 딸 교육을 잘못시켰다느니 내가 못사니 며느리가 시아비를 대수롭잖게 여기느니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올라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눈물만 흘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팔자 소관으로 돌렸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술도가에서 나오는 술은 주머니 사정으로 감당을 못하고, 밀주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농촌의 어느 집이나 같은 사정이었다. 밀주를 만드는 일이나 세무서원의 감시로부터 빠져나가는 일은 젊은 숙모의 몫이었다. 부엌 안의 땔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서 독을 묻어놓았는데 혹시 들켜도 큰 벌은 받지 않았다. 농부가 술 없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술 사발은 보통 그릇보다 컸다. 아침에 일어나면 작은 김치 그릇과 술 사발이 먼저 큰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그 큰 사발의 술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단번에 다 마셨다. 한 번은 숙모가 아침 술상을 차리는데 밀주가 다 떨어져 한 사발이 되질 못했다. 할 수 없이 그 사발에다 물을 조금 탔다. 그 싱거운 술을 자시던 할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술상을 통째로 마당으로 던졌다. 일직 시집와서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숙모는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어렸지만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와 술타령은 정말 보기 싫었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니 별로 겁은 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무척 어두웠다.

밤이면 할아버지는 언문으로 된 소설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등 고담 소설을 즐기다가 근래에는 신소설 '능라도'를 즐겨 읽었다. 문장이 정형으로 되어있지도 않은데 내재율을 만들어 구성지게 읽어나갔다. 동네 할머니들은 자주 와서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시작하는 이야기 대목은 달랐다. 책의 첫머리부터 시작하는 법은 없다. 둘둘 말아서 쥔 책을 연신 돌려가며 읽는데 할머니들은 주인공과 함께 탄식도 하고, 원망도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밤에는 석유가 떨어져 호롱불도 켜지 못하면 접시에 참기름을 붓고 그 안에 솜 심지를 담아 불을 댕겼다. 참기름 불은 밝기도 하고 냄새도 좋았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죽으려고 바다에 빠진다거나 그것을 어떤 의인이 구해내는 장면이 나오면 할머니들은 손뼉을 치거나 환호성을 울려 할아버지를 신나게 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평소 생활 가운데 이때의 모습이 제일 좋았다.

할머니의 품안에서만 서식하던 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들이가 부쩍 잦아졌다. 잠시도 집에 붙어있질 못하고 들로 산으로 동무들과 어울려 쏘다녔다. 놀데가 없으면 앞 개울물을 막아놓고 목욕도 하고 물장구를 치며 장난도 했다. 때로는 나무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띄우다가 물길을 따라 흘러가던 조각배가 돌다리 밑으로까지 떠내려갔다. 다리 밑은 시원했다. 큰 돌 여러 개를 개울 위에 얹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이곳을 돌다리걸이라 했다. 그 다리 밑에서 팡기, 씨돌이, 조환이들과 다투고, 웃고, 물싸움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붉은 노을을 적시며 집으로 돌아갔다.

돌다리걸은 이문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사무소도 그 옆에 세워져 있었다. 돌다리걸은 동네 위치를 가늠하는 자오선이 되었다. 우리 집도 돌다리걸에서 북쪽 서당마실 쪽으로 조금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초가집이다. 동네 모든 전달 사항은 이 돌다리 위에서 알려졌다.

"내일 아침, 수군푸(삽) 들고 부역 나오이소오오."

목청이 좋은 심 서방이 늦은 밤에 소리를 지르면 동네 끝까지 들렸다. 난청 지역은 그 부근까지 가서 같은 소리로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면 정확한 시간도 알리지 않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대충 같은 시간에 돌다리걸에 모였다. 그 때 시계가 있는 집은 몇 집 되지 않았고, 그런 집은 부역 대상도 되지 않았다. 밤이면 나이 든 사람들이 여기 모인다. 신문도 없고, 라디오도 없으니 자연스레 여기서 세상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입심 좋은 사람의 논설도 들을 수 있다. 그 사람의 별명이 빈호사(변호사)였는데 나는 그것이 사람 이름인줄 알았다. 어쩌다 외지의 친척이 다녀가면서 전해들은 이야기나, 볼일이 있어 멀리 다녀 온 사람은 이곳에서 뉴스의 중심에 선다. 이 소문은 신문보다 더 빨리 전파되어 온 동네가 다 알게 된다.

돌다리걸은 동네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장소가 되었다. 좋은 일은 여기를 빠져 나가고, 궂은일은 이곳을 밟고 어느 집이곤 찾아들었다. 함흥 비료 공장으로 돈 벌러 간다고 이 다리를 건너간 순덕이 오빠는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이 떠날 때 이 다리 위에서 울었고, 돌아올 때도 여기서 통곡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영기 삼촌은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일본 땅에서 하얀 통 속에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영기 숙모는 이 다리 위에 퍼질고 앉아 울다가 기절했다.

상여가 뒷산으로 올라갈 때는 이 다리걸에서 꼭 노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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