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시와 함께] 밥솥-이준규(1970~ )

입력 2015-08-06 01:00:01

그는 그늘로 걷고 있었다. 작고 하얀 개 두 마리가 그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목줄은 풀려 있었다. 강에 갔었다. 물빛은 물빛이었다. 아니, 물빛은 흙빛이었다. 아니, 아무렇게도 형언할 수 없었다. 시는 길어지거나 짧아지고 있었다. 그는 새로 첫 번째 시를 쓰고 새로 마지막 시를 쓰기도 했다. 아이들 축구 경기를 구경했다. 복잡했다. 거북이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다 말았다. 송충이가 많았다. 박새 떼가 왔다. 모두 그늘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달개비를 꺾으려다 말았다. 그는 그늘을 걷고 있었다. 나는 밥솥을 닦았다.(전문, 『네모』, 문학과 지성사, 2014)

이준규 시인이 이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슬픔만을 남기고 싶었다'라고 짧게 썼듯이 그의 시들은 오래된 사진들을 볼 때와 같은 흑백의 슬픔을 준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추억하게 해 준다.

상황을 그려보자. 7월의 오후, 집을 나와 강으로 가다가 목줄 풀린 개 두 마리가 하릴없이 걷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을 본다. 며칠 전의 비로 강은 흙빛이기도 하고 푸른빛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다가 그 어느 빛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를 고쳐 써야 할지, 아니면 써 놓고 온 시가 생의 마지막 시가 되어도 좋은지 강가에 앉아 한참을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동장 한 귀퉁이에 앉아 아이들 축구하는 것을 구경한다. 아이들… 문득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려다가 그만둔다. 머리 위 나무를 타고 오르는 벌레들과 그것을 보고 달려오는 새들. 우리 모두 그늘을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 달개비꽃을 한참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아닌) 내가 밥솥을 닦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겠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일상의 그림이 왜,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가? 이 시인의 시들은 쉽고 상냥한 듯 보이지만 오히려 어렵고 아주 불친절하다. 시집 뒷면에 시인은 자서처럼 짧은 글만을 남겼다. '너는 조금씩 번지고 있다. 너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나는 불을 켜고 나는 불을 끈다.' 이 시인의 시와 말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커다란 시공간적 공백이 있다. '그늘'이라는 이미지의 골격 사이에 배치된 '그'라고 하는 3인칭으로서의 나의 일상들과 '밥솥을 닦는'(주체적) 시인의 구체적 일상 사이에 커다란 공백이 존재함으로써, 빵이 부풀어 오르듯 시가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늘 밥솥을 닦는 한 남자 시인을 알고 있다. 그는 설거지하면서도 늘 시만을 생각하고, 시만 쓴다. 이 시가 그 같다…. '나는 사전을 덮고 부엌으로 간다.'('부엌') 그는 아마 지금 배수아가 번역한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다가, 부엌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시가 삶의 알리바이인 것도 문제지만, 삶이 시의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더 끔찍하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