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음압 병상 등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 '코호트 격리'라는 말이 있다. 코호트란 원래는 로마군단의 1단위(300~600명)를 말하는데, 사회학에서는 특정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출생 코호트는 5년 또는 1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한다. 코호트별로 공유하는 유사한 휴가지의 추억도 분명히 있을 터. 그래서 각 코호트마다 20대 시절 '그날'들을 떠올릴 이야기를 들어봤다. 왜 20대 시절이냐면 20대는 그저 친구가 좋아 또래와 휴가를 즐기면서 생긴 재미난 추억이 많아서다. 대개 30대가 되고 가정이 생기면 가족 단위 휴가를 떠나고, 자녀가 어느 정도 자란 40대 시기에는 혼자서 혹은 몇몇 사람과 취미를 즐기는 휴가를 보낸다.
#30대 남성
40'50대와 달리 30대는 20대 시절 여름 휴가지로 외국을 선택한 이들이 많다. 김모(31) 씨도 대학교 4학년 때 학과 친구와 여름방학을 맞아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규슈를 다녀왔다. 김 씨는 아직도 후쿠오카의 밤을 아쉬워한다.
후쿠오카에서 첫날 밤을 맞은 김 씨는 시원한 맥주를 즐기려고 친구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나카스. 하카타와 톈진 사이에 있는 나카스 강변을 따라 이어진 이곳에는 야타이라고 불리는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김 씨는 야타이에서 갈증이 가실 만큼 맥주를 즐기고서, 친구와 취업 고민 등을 나누며 후쿠오카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김 씨의 눈에 들어오는 야릇한 네온사인. 김 씨는 직감했다. '저기는 분명히 소프란도(한국의 안마시술소와 비슷한 일본의 성인 업소)다!'
호기심이 왕성한 김 씨는 친구에게 소프란도가 있는 방향으로 가자고 했다. 가까워질수록 직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소프란도가 한두 군데 있는 게 아니라 밀집해 있었다. 김 씨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친구에게 "저긴 뭐 하는 곳인데 여자 사진이 많이 있지?"라고 말했다. 친구도 "글쎄…"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소프란도 입구 앞까지 왔다. 둘은 입구에 있는 사진만 구경하고는 골목을 벗어났다.
김 씨는 "나중에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들었는데, 그날 우리 둘 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들어가 보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40대 남성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굳게 믿는 이 말은 법의곤충학자이자 프리랜서 과학수사가인 마르크 베네케가 쓴 책 제목이다. 최모(48) 씨도 이 말을 믿는다. 본인의 뼈아픈 경험이 있어서다.
때는 최 씨가 대학교 2학년이었던 27년 전 초여름 어느 날 오전. 최 씨와 친구 4명은 즉흥적으로 부산행 기차를 탔다. 최 씨와 친구들은 자리에 앉으며 옆 열에 있던 여성 5명을 흘깃 봤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 씨가 용기를 내어 여성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성들은 최 씨 또래의 구미국가공단 근로자였는데, 그들 역시 부산으로 놀러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기차 여행을 즐겼고, 부산역에서 이별했다.
그런데 최 씨 일행은 점심을 먹으러 들른 부산역 인근 식당에서 기차에서 만난 여성들과 다시 조우했다. '이것도 인연이다' 싶은 마음에 최 씨와 친구들은 합석해 여성들과 식사를 하고, 자갈치 시장이며 부산 곳곳을 함께 구경했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 대구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그녀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최 씨는 "나는 이듬해에 결혼했는데, 결혼 3년 차 때 아내가 내 앨범을 뒤적이다 웬 사진을 들고 와서 '이거 뭐냐?'고 따져 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날 찍은 사진이었다"며 "그중 제일 예쁜 여성과 내가 온종일 손잡고 다녔는데 사진도 그녀와 내가 마치 연인처럼 찍혀서 아내에게 해명하느라 고생했고, 엄청나게 혼났다. 아내에게 결백을 증명하고자 사진이 적발된 그날 밤 사진을 불태웠다. 그리고 대학 친구들과 부부 동반 모임에서도 사진에 있던 친구들은 아내에게 혼쭐이 났다"고 말했다.
#50대 여성
강미란(56) 씨는 1980년 8월 초 고등학교 친구 셋과 2박 3일 다녀온 휴가의 추억이 아련하다.
강 씨와 친구들은 휴가를 떠나기 2주 전부터 퇴근 후에 대구 남구 대명동 계명대 인근 지하에 있는 음악다방에 모였다. 어디로 떠날지, 무얼 먹을지 등을 음악다방 DJ가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계획하던 기억, 휴가지에서 필요한 것을 사러 다녔던 일. 강 씨는 휴가 준비 과정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강 씨는 "여자들끼리 며칠 동안 놀러 간다면 난리 날 시절이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고등학교 때부터 착실해서 그랬는지 부모님들이 조심히 다녀오란 걱정 외엔 별말씀이 없으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고 했다.
첫날은 배낭을 둘러메고 계룡산 계곡에 들러 계곡물에 발 담그고 더위를 식혔다. 둘째 날은 충남 부여에 있는 낙화암, 백마강, 고란사 등을 둘러봤다. 낙화암 위에선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백제 망국의 전설, 백마강에서는 모래톱에서 두꺼비집을 지으며 놀았던 기억, 고란사 가는 길에 태어나 처음 본 고란초. 당시 휴가를 위해 4만5천원 주고 산 카세트플레이어로 민박집에서 음악 들으며 수다 떠느라 밤을 하얗게 지새운 기억. 낙화암 인근 시골 마을에서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 길어 쌀 씻고 된장찌개도 끓여 먹었다. 강 씨는 아직도 그날이 꿈만 같다.
강 씨는 "젊은 여자 넷이 함께 다니니 시골 어른들이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많이 했다. 또 비스킷 준다며 접근하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런 거 받아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얻어먹지도, 말도 같이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순수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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