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한은형 지음/ 한겨레 출판 펴냄
자의식이 유별난 여자아이 이야기다. 1996년, 고등학교 1학년인 최하석은 거짓말과 진실 사이를 오가며 산다. 몸은 하루하루 성장하고, 정신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늘 자살을 꿈꾸면서도 손끝에서 피 한 방울 나는 것도 두려워한다. 참새가 통통 튀듯이 걷는 것은 언제 보았을까. 작가는 '참새가 통통 튀듯 싱그러운' 문체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하석은 배치고사에서 일등을 한 덕분에 중학교 입학식 때는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했으나, 우등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꼴찌가 되었다. 이어 전학 간 농땡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다시 우등생 반에 배치됐다. 자신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등, 꼴찌, 우등생을 오가니 세상만사가 하찮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이 계집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설명할 수 없으니 보여 줄 수밖에.
벌거벗은 채로 남자아이와 커튼을 덮고 학교에서 밤을 지낸 하석은 솔직한 반성문을 쓰라는 교감 선생님의 말씀에 한숨짓는다.
'솔직'이라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민주, 평화, 평등, 자유, 수호 같은 말들과 함께.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 이게 솔직의 뜻이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짓말을 즐겼고, 늘 뭔가를 숨겼으며. 바름을 혐오했고, 곧은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불투명한 사람이 좋았다. 솔직함을 자부하는 사람의 귓가에 이 말을 속삭여 주고 싶었다. '당신의 전부를 알고 싶지 않거든.'( 33-34 쪽.) 정말이지 안다고 다 지껄이거나 속에 든 걸 다 쏟아내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곤욕이다. '예의'의 본질은 거짓인데, 거짓이 싫다고 예의를 저버리다니!
그러면서도 이 아이는 어설픈 거짓말을 혐오한다.
'그런 거짓말은 거짓말 전체를 능욕한다. 거짓말은 그럴 듯해야 한다. 말이 되어야 한다. 아름답다면 더 좋다. 내가 생각하는 거짓말은 그랬다. 거짓말주의자에게도 도덕은 있는 것이다.' -86쪽-
사실이다. 거짓말은 사실을 말하는 편보다 더 어렵다. 거짓말이 진실처럼 보이자면 거짓말에 심취해야 한다. '거짓말주의자에게도 도덕은 있다'는 주인공의 말은 '도둑에게도 도(道)가 있다'는 대도 도척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렴 우아함이 배제된 것들은 무엇이든 볼썽사납다.
이 소녀의 유별난 자부심은 제 또래 여학생들의 생활태도를 바라보는 데서 정점에 달한다.
'여자애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의사표명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무언가에 대해 환호하거나 아니면 야유를 했다. 다른 경우의 수는 없었다. 전문적인 방청객이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이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1학년쯤 된 여자아이들만 이럴까. 나이 40이 넘은 여자들,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아줌마들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여학생들이 자의식 유별난 친구를 피로하게 만들 듯이, '거짓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거짓말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남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여자들의 습성 중 하나는 '함께 화장실 가기'다.
최하석은 '언제부터인가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 하는 애들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혼자서 복도를 걸어다녔고, 그 먼 길을 지나서 화장실에 갔다' 며 '나는 묻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여자애들에게 『화장실 같이 갈래?』라는 건 『도시락 같이 먹을래?』 『우리 집에 올래?』와 같은 말이다'고 말한다. 너무 많이 들어도 귀찮고, 듣지 않아도 문제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화장실이든, 도시락이든, 무엇이든, 혼자 해치울 줄 모르는 사람은 탐스럽지 않다. 함께 해치울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 큰 사람은 '혼자든 함께든' 개의치 않는다.
한은형의 '거짓말'을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읽은 뒤에는 '다 큰 여자들, 이제는 반쯤 늙은 여자들, 아니 완전히 늙은 여자들도 고1 여학생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까닭에 한은형의 소설은 '성장소설'이 아니라 '여성의 타고난 특성'에 관한 소설 같다. 자의식 강한 여자의 눈과 평범한 남자의 눈에 거슬리는 특성 말이다.
지은이 한은형은 2012년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으로 제19회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다. 이 소설 '거짓말'은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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