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1970~ )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2013)
"왜 예술은 일상 언어를 못마땅해하는가? 예술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떤 사물이 부재를 거쳐서 어떤 단어와 연결되었는데도 그 사물이 그 단어 속에 온전히 존재하리라고 믿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은 이 부재 자체를 다시 잡아내고 이해를 향한 끝없는 운동을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모리스 블랑쇼) 그러므로 이 시를 '죽은 나무'에서 푸른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의 뿌리에 '손을 뻗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시인이 그런 의도로 이 시를 썼다 해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 연과 연 사이에는 깊은 '침묵'과 '은폐'가 있다.
'생명에 대한'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첫 두 줄과 마지막 줄, 세 행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 사이를 새로운 단어와 이미지들이 치고 들어오면서 그 의미는 깨어지고 분산된다. 연둣빛 눈/ 피, 어둠/ 혀의 낯선 이미지와 '지워지던 빛의 칼집'이라는 섬세한 벌어짐은 무성한 푸른 나무를 기대하던 의식에 '검게 죽은 나무'를 되짚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밑동에 손을 뻗으며 이 역류하는 무의식의 흐름을 차단하려 한다. 심지어 '살아 있음'을 괄호로 무장시켜 행 사이로 강제로 밀어 넣는다. 의식의 강박과 무의식의 컴컴함.
그러나 이 시인은, 자신의 시의 부재를 알고 있다. 부재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부재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잘 붙잡히지 않는다. 안개처럼, 번지는 어둠처럼. 소설가 한강이 아닌 시인 한강의 다음 시집이 기대되는 이유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길을 모험하고 있다. 그녀는 어떤 다음 노래를 들려줄까? (부분. 「새벽에 들은 노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