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대구, 이 맛에 사는 즐거움

입력 2015-07-23 05:00:00

이영백(대구 수성구 상록로)

어느 기준에 맞닿아서부터 정년이란 것이 찾아오고, 하릴없이 등산 다니고, 모여서 술 마시다 보니 이룬 것 없이 세월이 꼭 퇴직하고 7년 7개월이 흘렀다.

하루하루 삶이 즐겁고 때에 따라 손녀 둘이 제 할아버지를 찾아올 때는 더욱 즐거웠다. 늦었지만 손자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더욱 신기할 뿐이다. 누가 그랬든가 나이 들어가면 손자'손녀들의 재롱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조용한 토요일 오후에 오롯이 한 명밖에 없는 처제가 찾아왔다.

"오늘, 편하다고 나이만 자꾸 먹지 말고, 시내 밥집에서 따뜻하고 맛나는 정식 한 그릇 하러 나갑시다!"

"돈은 누가 낼 거고?"

"돈, 오늘은 없는 돈이지만 내가 한턱 쏩니다!"

정말 형편도 어려운 처제가 오늘 시원하게 시내에서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맛깔 나는 반찬이 나오는 정식을 사겠다니 늘그막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덩달아 심심한지 내자는 처제를 부추긴다.

"모처럼 오늘 부자네 밥 한 번 얻어먹어 보자. 그런데 우리 나이에 걸맞은 그런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을 집이 시내 어디쯤에 있을 란가?"

"왜 카노? 내가 사면되지."

"어허! 동생이 밥 한 번 산다는 데 그냥 얻어먹으면 되지. 당신은∼?"

"그런가? 까짓 것, 누가 내든 말든 정말 오늘 시내에 오랜만에 나가 보겠습니다."

모처럼 조요(照耀)하고 살랑살랑한 토요일 오후, 손자'손녀들이 없는 토요일 오후 우리 늘그막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벌써 집을 나서고 있었다. 살랑살랑한 날씨에 미세먼지가 있을 줄 모른다고 나는 마스크와 장갑을 챙기고, 내자와 처제는 저절로 목도리와 장갑을 챙긴다.

곧장 도시철도를 향하여 범어역으로 내려갔다. 영남대에서 오는 도시철도에는 그래도 듬성듬성 빈자리가 있어서 알아서들 찾아 앉았다. 나이 든 이는 줄곧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대구은행역, 경대병원역을 지나고 반월당역에 닿았다. 스르르 열리는 자동문에 차례차례 내려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 반월당역에 도착하였다. 반월당역은 타고 내리는 것이 어느 역보다 붐비는 대구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대구 조금 외곽지 살면서 6분 만에 도심에 들어서서 지하상가 반월당역 메트로센터(Metro Center)를 거닌다. 내자와 처제는 상가에 전시된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벌써 눈이 자주 가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어렵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예, 오늘은 저만 따라오면 됩니다. 근무할 때 회합장소로 멋들어진 곳이 있습디다. 오늘 형부도 가보시고, 친구들과 자주 들리세요!"

"혹시 누구와 동업합니까?"

"절대 아입니다! 나는 즐거운 대구시민일 뿐입니다."

모처럼 여유 있는 농담과 반월당역 메트로센터에 전시된 각종 생필품을 아이쇼핑하면서 자꾸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진하여 마침내 막다른 곳에 도착하더니만 현대백화점을 반대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상에서 다시 들어가니 지하로 되면서 입구에 간판이 멋있었다. "티×니"라는 곳이었다. 레스토랑인가, 긴가민가하면서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맛깔 나는 반찬이 있는 정식을 먹는다고 했는데 이상함을 느끼면서 들어섰다.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이라는 영화제목이 뇌리를 스친다. 들어서고 보니 전에는 레스토랑을 한자리였다고 한다. 음식 가격은 중년 서민들에게 정말 딱 잘 어울리는 선이었고, 정식 삼 인분에 코다리찜을 시켜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코다리찜은 시간이 걸린다기에 안쪽에 자리를 정하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다. 높은 격인 대통령 훈장증도 보이고, 무슨 멤버십에서 받은 증명서도 걸려 있다. 청송 꽃 돌 화문석이 즐비하다.

마침내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세상에나! 도심 한가운데 지하식당에 들러 이러한 호사스러운 음식을 맛보다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먹어서 입맛을 느끼기에 제일 딱 맞는 반찬들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가오리무침 회요, 오이소박이에 청국장, 꽁치 시래기, 보시기 물김치, 산채, 향긋한 봄 냄새가 진동하는 초무침나물, 도라지무침, 잔멸치 볶음, 생오이초무침, 마늘종무침 등 이름도 모를 밑반찬들이 줄을 이어 나온다. 코다리찜은 술안주에 제격이라 모두 비워냈다.

찬을 보니 밥 반주가 생각났다.

"아주머니, 여기요! 술 있어요?"

"안 시켜서 그렇지 없는 것 빼고 다 있습니다."

바로 날아온 지역브랜드소주는 뚜껑을 돌려 따기 바쁘게 나에게 첫 잔이 주어졌다. 첫 잔 술 붓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갑다. 골∼골골하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첫 잔이 좋고, 나이가 더 많다고 먼저 주는 것이 그렇다.

곁들여 밥 반주로 소주를 한 잔씩 치니 이는 금상첨화요, 왕이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의 만찬이 따로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가오리무침 회는 너무 맛나 정말 맛있게 잘 먹었고, 꽁치시래기에는 셋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그 옛날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처제 말마따나 나이만 먹지 말고, 시내 밥집에서 따뜻하고 맛나는 정식 한 그릇 하면서 늙어감에 즐거운 날을 만나보자.

우리 셋은 대구, 이 맛에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중늙은이로 변화 발전한다. 돌아 나오는 길에 반월당역 메트로센터에 보태주고 가야 하겠기에 내자 바지를 만원에 하나 골랐고, 세트로 사면 할인된다는 남자용 로션을 덩달아 샀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들고서 이제 지상으로 올라가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중앙파출소에서 동성로, 걷는 길을 택하여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속으로 우리도 섞여 들어가 보았다.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다. 먹는 맛에서 보는 맛으로 옮겨왔다. 돌아오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 복작거리는 버스에 올라 어느새 오늘의 맛나고 재미났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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