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악역이었지만 관객 500만 돌파 기여 큰 보람
2002년 6월 대한민국이 월드컵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그날, 많은 이가 거리에 나와 '대~한민국'을 외쳤다. 배우 한성용(32)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생이었던 그는 신촌에서 환호성에 취했다. "부끄럽지만 2002년 당시에는 '연평해전'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고 고백한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됐을 때 더 신중했다. 저뿐 아니라 출연진 모두가 '연평해전'을 촬영할 때 엄숙했다. 허구가 아니라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몰입했다"고 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과 그들의 동료, 연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연평해전'(감독 김학순). 지난 20일 영진위 기준으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 이어 올해 개봉한 영화 가운데 흥행 3위(누적관객 558만 명)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성용은 흥행을 기뻐하면서도 마냥 좋아하진 않았다. '영웅들' 생각에 여전히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한성용은 '연평해전'을 정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한민족끼리 일어난 가슴 아픈 일이지 않나. 잘못 해석되지 않고 그냥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며 "두 번 다신 없어야 하는 일이다. 곡해되는 건 연기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프고, 또 전사자들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것 같다"고 짚었다. 영화는 다행히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데이트 영화로 손색이 없었고, 애국심 고취까지 이어졌다. "제가 꼬박 3년을 '연평해전'에 참여했어요. 흥행이 됐으면 하고 바라긴 했는데 500만 관객까지 돌파하게 됐다니 기분이 묘해요. 특히 20대 관객이 많이 봤다고 하던데 정말 고마운 일이죠."
한성용은 극 중 박동혁(이현우) 상병을 괴롭히는 얄미운 선임 이용세 병장 역을 연기했기에 욕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즐겁다. "저에 대해 욕하는 게 아니라 이 병장을 욕하니깐 괜찮죠. 욕이든 칭찬이든 관심을 보여주신 것만도 고맙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이 병장이 박동혁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 용서를 구하며 오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편집이 됐다는 거예요. 그래도 제 장면을 전투신이나 다른 부분으로 대체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거로 생각하니 괜찮아요. 또 현우를 괴롭혀 걱정되긴 했는데 현우가 SNS에 '착한 형'이라고 올려줘 고마웠다니까요.(웃음)"
사실 한성용의 캐릭터는 처음에는 웃음을 주는 감초 역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건한 작품에 웃음을 주는 건 아니라는 판단에 군대 내 있을 법한 인물들을 합쳤고,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그는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인간의 이기심이나 나약함에 대해 표현할 수 있고, 군 생활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야 하는 인물 같았다. 또 나중에는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로, 내 캐릭터가 남과 북을 잇는 일종의 어떤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민족이 아픔을 주면, 결국은 서로 아플 뿐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연평해전'은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작이 중단되고, 투자배급사가 바뀌기도 했다. 고 윤영하 소령 역에 배우 정석원이 참여했다가 김무열로 바뀌기도 했다. '연평해전'을 향한 높은 관심에 정석원이 아쉬워할 수도 있겠다는 말에 한성용은 "석원이는 '연평해전'이 잘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형 진짜 고생했어요'라는 말도 하더라. 서운해하지 않았다. 두 명의 윤영하와 함께했고 몇몇 배우가 바뀌기도 했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영화 촬영에 임했다"고 회상했다.
한성용은 본인을 '중고 신인'이라고 칭했다. 2004년 영화 '바람의 파이터'로 데뷔,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나 얼굴을 제대로 알린 적은 없다. 다행히 '연평해전'을 통해 조금 관객에게 더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최신작 '손님'에도 나왔으나 그를 기억하는 이는 눈썰미 좋은 관객과 그의 가족, 소속사 관계자들이 전부일 뿐이다. 초등학교 때 전국웅변대회에서 입상하고, 교회에서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연극을 하게 됐다는 한성용. 고2 때부터 보조 출연자로 일했고, 수많은 작품에서 시체부터 단명하는 인물 등을 연기했다. 늦게 빛을 본 배우 중 고생 안 한 사람을 꼽는 게 더 어려운 일이겠으나 한성용도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건 분명하다. 흥행한 영화에 중요도가 4번째 정도의 배역에도 캐스팅됐으나 반대에 부딪혔고, 6차례 오디션을 보고도 결국 제작자의 마음에 안 들어 단역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그는 "아쉬울 뿐"이라며 "기회가 더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게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정진하고 있는 한성용은 최근에도 헬스 트레이너와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이어가고 있다. "'연평해전'을 많이 보셨는지 요즘 회원님과 손님들이 '배우였느냐?'고 많이 물어보세요. 힘들지 않으냐고요? 계속하던 일인데요. 헬스 트레이너는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만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밤에 고깃집에서는 지친 분들이 와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들으며 '요즘은 이런 일이 힘들구나'라며 세상살이를 배워요. 어떻게 보면 간접체험 연기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트레이너였기에 탄탄한 몸을 가졌던 한성용은 새로운 역할을 위해 비리비리하게 보이도록 근육량을 줄이고 있다. 6개월 정도 됐다. 왜소하고 작아 보이는 몸이기에 과거 탄탄했던 몸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해 건네받은 사진. 몸이 근육질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다. 근육을 만들고 없애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독하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도 독해 보이는 데 한몫한다.
"독해야지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어떤 배우는 하루 100번 연습한다고 하더라. 넌 1천 번, 1만 번 해도 될까 말까야'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또 부모님이 안 해본 장사가 없이 고생하신 것도 제가 독해진 이유인 것 같아요. 저보고 계속 연기 그만두라고 하셨는데 '연평해전'을 보고는 안심하시는 것 같아요. 다행이죠. 제 인상이 차가워 보인다고요? 말해보면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나요? 사람들이 무척 착하다던데…. 웃음"
욕심일지 모르지만 그는 한 가지 바람을 전했다. "올해 '어벤져스2'라는 외국 영화가 1천만 명을 넘었잖아요. 만화이긴 하지만 외국 영웅들도 그랬는데 우리나라의 실재 영웅들의 이야기도 1천만 관객을 넘으면 좋겠어요. '어벤져스' 못지않은 배우들이 영웅들을 표현해줬다고도 생각하거든요. 1천만 넘으면 무슨 보너스가 있느냐고요? 그런 건 몰라요. 그냥 저는 감독님이 저를 믿고 3년 동안 배역을 내어주고 연기하게 해준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현철(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사진 클로버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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