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여름, 하드보일드

입력 2015-07-23 05:00:00

홈스와 뤼팽, 아가사 크리스티를 먼저 읽긴 했지만, 장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무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김중혁 소설가가 한 칼럼에서 '핫키드'에 대한 대단한 칭찬을 한 것을 읽고는 엘모어 레너드를 접했고,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지는 못했지만 뭐랄까, 핫키드를 읽은 후에는 더 이상 이 세계와 그 세계관을 무시할 수는 없게 됐다. 그래서 좀 더 폭넓게 탐독하지 않으면 굉장히 중요한 세계를 영원히 모르게 될 것 같아 눈이 벌겋게 됐었다.

때마침 당시 받아보던 잡지 '브뤼트'에서 '하드보일드 소설'을 주제로 다뤘고, 브뤼트를 가이드 삼아 탐독을 시작했다. 독자인 나로선 한껏 팔랑거리는 귀로(아니 읽었으니 '팔랑눈'이라고 해야 하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나, 반신욕을 할 때나, 운전 중 신호를 기다릴 때나, 슈퍼를 방문하기 위해 걸어야 할 때나, 유치한 텔레비전 프로가 보고 싶어질 때나,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추리소설을 읽고 또 읽으며 이 여름을 보내겠다며 사랑의 서약을 했었다.

미국과 일본 하드보일드, 사회파 소설의 계보를 한눈에 알 수 있게 그려놓은 브뤼트 잡지 속 계보 트리를 중심으로 각 스타일 대표주자들의 작품을 먼저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고작 대여섯 작품째에 이르자 후유증이 밤마다 방문을 두드리게 됐는데,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살인, 시체 은폐를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각종 잔인한 방법, 살인자와의 끔찍한 대치, 범죄를 알게 된 친구가 쏟아내는 협박에 이은 상납, 끝내 가장 믿었던 인간이 목에 칼(혹은 총)을 들이대는 순간들, 그 모든 장면들을 이 작품 저 작품으로 반복하는 사이 나는 잔인한 장면에 대한 면역이 길러져 그 어떤 장면도 쉬 읽어 내릴 수 있게 간이 커진 동시에 새벽의 편의점을 끊어야 할 만큼 덜덜 떨게 됐다.

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스릴러들도 좋아했지만, 사회의 모순이 범죄의 동기가 되어 결국 현대사회의 이면을 집요하게 보여주는 일본 사회파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됐다. 일본 사회파 소설 대표 작가들의 작품인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은 한국에서도 영화화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이 같은 하드보일드 소설의 마력은 무엇보다 사회를 보는 시선에 있는 듯하다. 어쩌면 지극히 영화적이거나 소설적인 트릭이라고 생각되는 장면 역시 사실은 사회면에서 자주 읽던 스트레이트 기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하드보일드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악몽보다, 더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류가 현존하는 한 하드보일드 소설은 아마 계속 그 계보를 이어갈 듯하다. 영화 '인셉션'에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 팽이를 돌리듯, 하드보일드 소설은 내가 살고 있는 냉혹한 세계의 단면을 악몽처럼 보여준다.

다시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하드보일드 소설을 탐독해보는 건 어떨까, 팽이를 돌리듯.

김인혜 독립출판물서점 더폴락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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