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때문에 또 민간인 사찰 의심
의혹 벗으려면 오래 꿋꿋이 견뎌야
미국은 법으로 통신사에 감청 의무
이탈리아 IT 기업으로부터 원격 해킹 프로그램인 RCS(Remote Control System: 원격조정시스템) 20개를 사들여 사용한 게 알려지면서 물의를 빚던 국정원의 40대 전산기술자가 남긴 유서가 공개됐다. 국정원 앞으로 남긴 유서에는 내국인'선거 사찰은 전혀 없었고, 국정원 위상을 염려하여 대테러'대북활동에 오해를 일으킬 만한 자료를 삭제하였다고 쓰여 있다.
특정 자료 삭제는 자신의 판단부족으로 저지른 실수였지 우려할 부분은 아니라고 했다. 사자(死者)의 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다. 디지털 포렌식(컴퓨터에 남아 있는 해당 자료를 다시 추출) 기술로 지워버린 자료를 100% 복원할 수 있다니, 국정원이 수입해서 쓴 해킹 프로그램으로 진짜 국가 안보를 위한 대북'대테러 용도로 썼는지, 아니면 구태(舊態)와 결별하지 못한 채 못된 습성을 보였는지 곧 가려질 것이다.
고인이 지운 파일에 대북 관련 외국인 용의자 명단이 들어 있다는 설들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데이터 복원이 끝나봐야 알 수 있다. 만에 하나 외국인 간첩 용의자 명단이라면 국회 정보위는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줄 필요는 있지만, 국정원이 간첩이나 테러를 막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 흔적이라면 아무리 정보위 소속 국회의원들이라도 함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치적 입장이 나라 안보보다 앞설 수는 없다.
한국적인 특수 사항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35개국 97개 기관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시끄러운 나라는 없다. 일찍이 국정원이 '민간인 사찰'이라는 원죄(原罪)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번에도 "사찰 아냐…"라는 의혹을 산다고 해도 억울해할 입장이 못된다. 과거 국정원은 정치권 인사들과 부산 초원복어집에서 몰래 만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친 이래, 1998년에는 미림팀을 통해 정'재계 인사들을 불법 사찰했고, 2005년에도 비밀 도청팀을 가동한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이 터지지 않았는가. 원죄를 씻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국정원은 국정원 본연의 임무 일을 하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국정원 손발을 묶고 있는 현실도 개선해 주어야 한다. 첨단통신시대, 국정원 업무의 핵심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감청활동과 직결된다.
현재 우리 국정원은 합법적인 감청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하다.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이 제17대 국회 때부터 지금까지 개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통신 비밀은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하지만, 사생활 보장을 이유로 국가 존립에 꼭 필요한 합법적인 감청 시스템까지 못하도록 법 개정을 늦추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물론 지금도 영장을 발부받으면 휴대폰 감청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통신사 서버에 감청 시스템이 설치되지 않은 개별 휴대폰 감청은 그만큼 한계도 크다. 통화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누구랑 몇 분간 통화한 것은 알 수 있지만, 통화 내용은 저장되지 않아 모른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감청 청정지역이다. 감청 프리국가라는 상태는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흔들릴 만한 위기 사태가 발생하거나 명백하게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분단 현실에서 국정원이 간첩을 잡지 말고, 북한 사이버사령부나 해킹 팀에서 뭘 하든 그냥 두고 보고만 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미국은 '법집행기관을 위한 통신지원법'을 통해 통신 사업자에게 정부의 감청업무에 협조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으며, 9'11테러 이후에는 '애국법'(USA Patriot Act)을 제정하여 통신 감청 대상을 완전 확대하였다. 분단국가에 감청 청정지역,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심의실장 겸 특임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