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1966~ )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부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 지성사. 2014)
뿌리와 줄기라는 이미지 체계는 낡은 재현 체계다. 뿌리는 근원의 물을 길어 올리고, 줄기와 잎은 성숙과 회귀의 장소로 배치된, 삶에 대한 이 재현 체계는 동일한 이미지의 반복만을 보여 줬을 뿐이다. 왜 우리는 뿌리의 신도가 되거나 줄기 혹은 잎의 신도가 되어야 하는가? 왜 시작이 있어야 하고 끝은 그렇게 배치되어야 하나? '희박'하고 '위태롭게 파닥'이는 것은 정말 '끝'으로 가는 길인가? 그리고 그 길은 '당신에게로 가는 길'인가?
삶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들뢰즈)이 아닐까. 하여 뿌리로부터 멀어지면서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다.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러나 여전한 뿌리와 줄기라는 종말론적 체계 속에서는 '일용할 잎과 꽃'이 입을 다물어 버릴 때, 우리는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방법은 뿌리뿐만 아니라 잎과 꽃도 잊어버리는 것, 낡은 재현체계를 부숴버리는 것 아닐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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