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입맛에 맞추려 하지 말게, 창작은 내 주관의 작업이니…

입력 2015-07-18 05:00:00

괄호 속의 시간/이강숙 지음/현대문학 펴냄

우리나라 현대 문학에서 아쉬운 점 중 하나는 '우리나라 작가 중에 문학 외에 다른 일에 심취해본 사람이 드물다'는 점이다. 등단한 작가들 절대다수가 문학을 전공했고, 문학 외 다른 분야에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문학적 테크닉'은 뛰어나지만 작품의 폭은 협소하고, 이야기 자체도 밋밋하다.

소설집 '괄호 속의 시간'은 평생 음악이론 구축과 음악교육에 이바지해온 이강숙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펴낸 작품이다. 이강숙 전 총장은 1936년생으로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조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KBS 교향악단 초대 총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 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을 시작으로 6년에 걸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체제를 완성시켰고, 이후 이 학교 초대 총장부터 3대 총장까지 역임했다.

1998년 '술과 아내'라는 에세이를 현대문학에 발표했고, 2001년 단편 소설 '빈 병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았던 그는 65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뒤 여러 권의 소설책을 냈다. 음악과 함께 살아온 사람답게 그의 작품은 음악에서 파생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음악으로 집적시키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괄호 속의 시간'은 작가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발표한 15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것이다. 자기 내면의 진실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의 힘겨운 투쟁을 다채로운 시선으로 보여준다. 수록된 작품 중 '반쯤 죽은 남자'는 제39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노래는 초등학교 때부터 불렀고, 피아노는 중 2때부터 배웠다. 하지만 청음과 시창, 화성법이 문제였다. 가르쳐 줄 사람이 시골에는 없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낮은 도에서 높은 도로 올라가는 장음계의 소리다. 도 시 라 솔 파 미 레 도…. 높은 도에서 낮은 도로 내려오는 장음계의 소리다. 미학(주인공 이름)은 도 음에서 솔 음을 바로 낼 수 없다. 도에서 레 음은 바로 낼 수 있다. 레 음이 도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도 음에서 솔 음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문 음악가가 아니라면 접하지 않을 성싶은 경험이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의 친구인 지곡은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유명한 작곡가 H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작곡가 H를 소개해준 K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애매했다. 지곡의 귀에는 부정적으로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곡은 죽고 싶었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죽고 싶었다.(중략) 지곡은 정신이 든 사람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중략) 창작의 뿌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흔들림의 힘이다. 나에게도 그런 흔들림이 있다.(중략) 작곡이 나를 버릴지는 몰라도 H! 너 때문에 내가 작곡을 버릴 수는 없지. 맞아, 내가 죽을 때까지 잡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중략) 지곡은, 그래 죽을 때까지 잡고 있자는 말을 되풀이 했다.' -반쯤 죽은 남자-중에서.

창작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객관의 눈은 '저따위 것을 왜 하지?'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그러나 주관의 눈으로 창작에 임하는 자는 객관의 눈을, 귀를, 보편적 인식을 호사시켜 주기 위해 글을 쓰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자기 주관이 시키는 일을 하고, 그 주관에 충격을 받는 눈과 귀를 만나기 바랄 뿐이다. 자부심 강한 셰프들이 자신이 요리한 음식에 손님들이 기호에 따라 향신료를 추가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내가 만든 완벽한 음식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하세요. 맛에 변화를 주는 것은 불허합니다.'

창작에 매달린 사람들 역시 그렇다. 작가 이강숙은 음악을 소재로 여러 인물의 치열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음악가 이강숙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술은 나의 학문이야. 취향의 기준 찾기를 위한 것이야"라고 말하며 자주, 많은 양의 술을 마신다. 이런 장면은 작가 이강숙의 실제 생활이기도 하다. 이강숙은 암 수술을 했지만 여전히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때로는 폭탄주를 마신다. 대낮에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그 멋진 미소와 함께 테이블 위에 소주병과 맥주병을 맨 먼저 올려놓는다.

525쪽, 1만4천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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