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시와함께]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입력 2015-07-16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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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굉(1952~ )

방랑 같은 걸 꿈꿀 수 없는 시절을 산다. 밀란 쿤데라식의 느림은 얼마나 사치인가. 나는 신천대로가 끝나는 팔달교 부근이 꽉 막히기를 기대하며 차를 몬다. 차가 금호강 느린 흐름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때, 나는 비로소 강을 굽어본다. 중금속으로 이제 얼음이 얼지 않는 강. 그 위를 걷는 겨울새의 처연함 같은 것. 거기 노을이라도 비칠라치면, 물결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직여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차는 느리게 움직이다 한참을 멈추어 선다. 버튼을 눌러 신중현의 새 앨범 「김삿갓」을 듣는다.

대체 술이며 풍경의 깊이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락은 신중현의 저항의 방식이며 유효해 보인다. 방법이 있다면 늙음 또한 두려워할 게 아니잖는가. 그러나 세상을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건널 수 없음이여. 내 몸 또한 저 물과 같아서, 처음은 순결했으나 이제 마음의 가장 얕은 바닥조차 비출 수 없게 되었다.

(전문. 『철학하는 엘리베이터』. 만인사. 2003)

속도는 희망이었고 그리하여 정지는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비릴리오(1932~ )는 『속도와 정치』라는 책에서 세계는 점점 더 속도를 높이는 가속의 정치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하였다. 가령 더 빠른 인터넷 속도, 더 빠른 자동차와 비행기는 공간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갔고, 핵폭탄은 그 속도 정치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속도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느림은 혁명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공장의 속도를 멈춰 세우는 "총파업은 시간 속에 쌓아 놓은 바리케이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이미 희망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느림은 차가 막히는 것과 같은 우발적 계기에 의해서만 온다. 그것은 짧은 예외의 시간일 뿐이다. 문화란 그 짧은 시간의 기계 속에 부어져 형형색색의 빛으로, 재도 없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오직 술만이 우리의 발걸음을 비틀거리게 하고, 우리가 나아가는 속도를 떨어뜨리게 하고, 혹은 길에 엎어져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천천히 돌아보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희망이 될 수 없다. 속도에 의해 변형된 공간은 '얼지 않는 강'으로 액체가 되어 흘러간다. 도대체 우리에게 "풍경의 깊이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시인의 최초는 '물처럼 순결'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희망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순결함으로 바닥을 보여주는 것. 세상이, 정치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흘러가도 그 속도 밑에 비속도로 가라앉아 있는 궁극의 바닥을 보여주는 것, 그러한 틈으로서의 시인이 되는 것. 그러나 느려지기 위해, 우리의 몸이 원심력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우리의 발은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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