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만어] 기업과 헌신

입력 2015-07-15 05:00:00

10대 300년 만석꾼. 경주 최 부자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부(富)를 오래 이어온 가문이다. 최 부자가 그처럼 오랫동안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정직, 성실, 혁신, 사회적 공헌 등 다양한 덕목이 작용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요인은 '헌신'일 것이다. 노비는 물론 소작인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최 부자는 부를 일구고 유지할 수 있었다.

최 부자가 부를 일구던 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피폐했던 시절이다. 최 부자는 작인들에게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적용했다. 작인이 남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고 수확량의 2분의 1을 지대로 납부하는 방식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작인이 농사를 잘 지어도 겨우 먹고살 정도만 남기고 지주가 다 긁어가는 '작개제'(作介制)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최 부자의 병작반수제는 작인들의 헌신을 이끌어냈고, 최 부자가 부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됐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4번째 경제규모(GDP와 인구)를 자랑한다. 그에 걸맞게 경쟁력 있는 대기업도 많다. 재벌그룹이 30개가 넘고, 그중 4, 5개는 세계적으로도 굴지의 기업이다. 재벌과 하청 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은 수천 개다. 그러나 이들 중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은 드물다.

대기업은 분기마다 수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는데, 중소기업은 먹고살기도 빠듯하다.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쥐어짜기 때문이다. 겨우 먹고살 만큼만 남겨주는 조선시대 '작개법'과 닮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중소기업 입장에서 재투자와 연구는 언감생심이다. 첨단 기술을 개발할 여지는 극히 적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그들의 생산품은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우리나라 10대 재벌이 직접 고용하고 있는 근로자는 120만 명이다. 2천600만 경제활동인구 중에 5%가 채 안 된다. 매년 수조원대에 이르는 재벌기업의 영업이익은 중소기업과 그 종사자들에게로 흘러가지 않는다. 중소기업과 그 종사자들이 이타적 '헌신' 대신 이기적 '투쟁'을 외치는 까닭이기도 하다.(물론 정당성 없이 투쟁만 외치는 노조도 있다.)

경주 최 부자는 농번기에 작인들에게 점심을 배불리 먹였다. 당시 농민들은 하루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 하루 세 끼가 정착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병작반수제와 함께 하루 세 끼 배부른 식사는 작인들의 헌신을 이끌어냈고, 최 부자는 300년 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재벌더러 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재벌 혼자 뛰어서는 멀리 갈 수 없음을 300년 최 부자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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