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대나무로 만든 전통악기 '앙끌룽'
쉽고 저렴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어
지휘자'관객 합동연주시 화음 기대 이상
약자가 주인공 되는 화합의 장 만들어
인도네시아에는 '반둥'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비동맹그룹을 탄생시킨 '반둥회의'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반둥회의는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55년 무렵 미국-소련 양 진영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고 천명하던 제3세계 국가들의 회의체입니다. 당시 회의에는 주인 격이었던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을 비롯하여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은크루마, 중국의 저우언라이 등 아시아, 아프리카 25개국 정상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회의의 결과로 그들은 인종'민족'국가 간의 평등과 열강의 정치게임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10개 항의 '반둥 선언'을 채택하였습니다. 국제정치사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소외되고 핍박받던 약자들이 화합하여 강자의 게임에 희생되지 않으려고 자구책을 강구했던 모임입니다.
그런 반둥에 사웅 앙끌룽 욷조(Saung Anglung Udjo)라는 곳이 있습니다. 대나무로 만든 전통악기 앙끌룽을 연주하는 공연장입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현대와 전통을 조합한 복장에 낡은 슬리퍼로 구색을 갖춘 욷조 아저씨가 어슬렁거리며 무대로 나옵니다. 엉뚱한 행색과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포스 때문에 관객들이 의아해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앙끌룽이 흔들리는 순간 반전이 일어납니다. "따르르~ 따르르~"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청아한 음의 기습에 사람들은 숨을 멈춥니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고운 소리도 아니고, 새로운 소리도 아닙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그냥 마른 대나무를 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소리에 제압당하여 다들 꼼짝하지 못합니다.
첫 공연은 아이들의 무대입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이 객석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사를 합니다. 권위적인 음악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잠시 동안 관객과 어울리던 아이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하자 욷조 아저씨는 지휘를 시작합니다. 무대 전체가 하나의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처럼 작동합니다. 한 곡이 끝나면 욷조 아저씨가 흥을 돋우며 만담을 하는데 앙끌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앙끌룽은 마을에서 생산되는 대나무로 제작하는데 음계에 따라 대나무의 길이를 다르게 하여 만든다고 합니다. 현지어로 5M, 즉 쉽고(Mudah), 저렴하고(Murah), 교육적이고(Mendidik), 매력적이고(Menarik), 대중적(Masal)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함께 즐길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면 전체 관객들에게 음이 다른 앙끌룽을 하나씩 나누어줍니다. 그러고는 지휘자의 몸동작에 따라 앙끌룽을 흔들도록 합니다. 지휘자가 오른손을 들면 '도', 왼손을 들면 '레'를 들고 있는 사람이 흔드는 방식입니다. 본격적으로 연주가 시작되면 지휘자는 춤을 추고 관객들은 지휘자의 몸동작에 맞추어 자신에게 할당된 앙끌룽을 흔듭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하는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대충 따라하지만 막상 연주가 시작되면 달라집니다. 수백 개의 대나무 통에서 나오는 화음이 전문 오케스트라의 합동연주 이상임을 알고 놀랍니다. 관객들의 태도가 바뀝니다. 진지해지고 적극적이 됩니다. 값싼 대나무여서 음색이 곱지 않다는 생각은 기우입니다. 오히려 대나무 재질이어서 소리가 경박하지도 신경질적이지도 않습니다.
반둥회의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이유는 바로 앙끌룽 때문일지 모릅니다. 당시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에 절실한 것이 앙끌룽의 정신이었습니다. 약자들이 주인이 될 수 있는 화합의 장, 다양성이 융합될 수 있는 협력의 장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반둥회의 60주년에 참석하여 "과거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한 전범국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이 식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정태/경북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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