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의 문중이야기] <8>성산 여씨-충(忠)과 의(義)의 표상, 여대로(呂大老)

입력 2015-07-07 05:00:00

임란 나자 가산 털어 의병…왜군 연파, 지례·김산 지켜내

경양서원,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경양서원,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임란 의병장 감호 여대로 창의비.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실천한 김천의 성산 여씨 문중 여대로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바위에 거북을 새겨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웠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임란 의병장 감호 여대로 창의비.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실천한 김천의 성산 여씨 문중 여대로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바위에 거북을 새겨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웠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맑고 맑은 감천은 쉬지 않고 흘렀다. 이곳 옛 전쟁터에 빗돌을 높이 세워 만민이 우러르니, 아아 감호 여 선생, 나라 위한 붉은 충혼, 오늘도 상량하리. 길이길이 돌보시어 호국신이 되옵소서.'

김천의 성산 여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인 여대로(呂大老'1552~1619)가 아들 3형제와 함께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고자 창의(倡義: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여대로 창의비(呂大老 倡義碑) 내용 중 일부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김천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아 왜병과 전투를 치렀던 의병장 여대로의 삶을 따라가 봤다. [*한자 관련=성산 여씨 문중에서는 呂자를 입구(口)자 두 개 사이에 선을 빼고 사용합니다]

◆가산(家産)을 헐어 의병(義兵)을 모으다

일찍이 총명함이 남달랐던 여대로는 퇴계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582년(선조 15년)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던 여대로는 1592년(선조 25년)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기를 마을(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로 낙향해 아들 삼 형제를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하지만 이런 한가함도 잠시, 같은 해 4월에 부산포에 왜군이 쳐들어와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파죽지세로 조선땅으로 진군한 왜군은 인근 지례현과 김산군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이 함락당해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란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여대로는 마을 뒷산에 올라 분루를 흘리며 선조가 있는 북쪽을 보고 절을 하며 임금의 무탈을 기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주력부대를 삼로로 나눠 한양을 함락하는 전격전을 펼쳤다. 왜군의 진격은 좌로는 동래~기장~좌수영~울산~경주~영천~의흥~군위~문경을 거쳐 진행됐으며, 중로는 동래~양산~밀양~청도~경산~대구~인동~선산~상주, 우로는 동래~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성주~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를 거쳐 한양을 향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은 한양의 함락을 위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진격함으로써 왜군의 진격로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별다른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여대로가 거주하던 기를 마을도 왜군이 거쳐 가는 통로에 있었지만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한양을 함락한 왜군들이 조선 8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함락전을 펼치기 시작하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왜장 모리 데루모토는 경상북도를 장악할 목적으로 같은 해 5월 10일 현풍, 18일 성주를 점령하고, 6월 12일 개령현(현 김천시 개령면)에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해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왜군들은 개령현에 주둔한 군영 주변에 견고한 이중 목책을 구축하고 개령의 백성 700~800명을 목책 내에 가둔 뒤 온갖 사역에 동원했다.

◆나라를 위해 일어서 용맹한 의병

이 소식은 김산과 지례 등지에 세거하던 여대로 등 유림에게 전해졌고 이들이 창의하면서 왜군과 의병 사이에 개령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기를 마을에 거주하던 여대로도 서울로 진격해 갔던 왜군들이 인근 개령현에 군진(軍陣)을 설치하고 주변을 공략하려 한다는 소식에 집안의 식솔들과 마을의 장정 30여 명을 모았다. 격문(檄文)을 준비한 여대로는 가산(家産)을 헐어 군량미를 마련하고 아들 삼 형제와 마을 장정들을 인근 마을에 보내 의병을 모았다. 수일 만에 여대로 휘하에는 500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더불어 여대로와 사돈 간인 권응성(權應聖'?~1592)은 조마면 장암리에서 의병을 모았다. 또 황간에서 창의한 박이룡(朴以龍)은 하로 마을(현 김천시 양천동)에 5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군진을 설치했다. 이들은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송암(松庵) 김면(金沔'1541~1593)과 함께 개령에 주둔한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여대로는 의병을 모은 후 6월 22일, 초유사(招諭使'임진왜란 때 조정에서 내린 임시벼슬)를 맡고 있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과 머리를 맞대고 왜군을 토벌할 전략을 세웠다. 이때 김성일의 추천으로 여대로는 지례 현감으로 임명됐다.

7월 17일 지례'김산의 왜군이 거창을 향한다는 정보에 따라 여대로는 김면'권응성 등과 함께 2천 명의 의병으로 우치현(현 우두령)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이때 여대로의 3남 중 여희우가 전사했다. 7월 29일에는 무풍에서 퇴각한 왜적이 지례향교 창고로 피하자 여대로'권응성 등이 김면과 함께 왜군을 포위하고 화공을 펼쳐 지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9월 초순 초유사 김성일의 주선으로 진주의 김시민(金時敏)이 김산으로 왔으며 여대로 등이 이끄는 의병들은 세 차례의 전투 끝에 공자동을 탈환했다. 이처럼 개령에 주둔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들이 끊임없이 공격하자 이듬해 1월 26일경에 개령의 왜군은 절반이 후퇴했다. 이어 2월 12일 명군의 남하 소식을 들은 왜군은 김산군 부근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의(義)를 위해 살다간 여대로

여대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사귀는 데 나름의 원칙을 고수했다. 정도를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이들과는 선을 그은 것. 특히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그의 이런 고지식한 성품은 벼슬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대로는 사헌부 지평으로 내직에 잠시 머물렀을 뿐 평생을 내직보다 외직인 지방관으로 떠돌았다.

후세에 여대로를 '권세에 굴하지 않고 의를 위해 살다 갔다'고 평하는 이유다.

여대로의 이런 대쪽 같은 성정은 당대 북인(北人)의 영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과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대로는 1607년(선조 40)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부임했다. 당시 초계(현 합천군 합천면 초계리)에 살던 정인홍은 북인을 이끌며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세도가였다. 여대로의 인품을 탐낸 정인홍은 그가 집 앞을 지나자 의관을 갖추고 향토민으로서 우의를 맺고자 청했다.

하지만 여대로는 "상공이 어찌 시속에 얽매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답하고 읍을 하고 물러났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당대의 세도가에 의탁해 권력을 탐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여대로의 단호한 대처에 그날은 정인홍도 어찌하지 못하고, 뒷날 또 그 마음을 떠보려고 종이와 부채를 요청했다.

여대로는 답으로 "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 이 산중에도 이르네(倻山霜早 楮木盡枯 世間炎熱 亦到山林)"란 글을 보냈다. 가야산의 닥나무가 말라 죽어 부채를 만들 수 없으며 무더위가 산중에까지 미치니 부채 정도로는 더위를 피할 수 없다는 의미로 정인홍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벼슬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많아 크게 기용될 기회가 없었다.

훗날 여대로는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옹립해 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그의 이런 대쪽 같은 성품을 두고 장현광은 "여공의 성품이 엄하기가 땅에 자를 댄 듯하고, 권력가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정경세는 "계수나무 매운맛이 변할 수 없고 맑은 샘이 어찌 더러움과 합하랴"고 칭송했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감천 휘감는 태극 중앙에 위치, 계곡 6개…6판서 배출 '대길지'

◆경양사(鏡陽祠)와 경양서원(鏡陽書院)

경양사는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不祧廟)다. 경양서원 좌측에 위치한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94년 발행된 금릉군지(金陵郡誌)에 따르면 숙종 재위 시절(1674~1720) 창건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경양서원은 송오(松烏) 여응구(呂應龜'1523~1577)와 그의 아들 감호 여대로를 제향한 서원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양사와 함께 숙종 시절 창건됐다는 기록이 금릉군지에 남아있다. 1868년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사당은 철거하고 강당은 그대로 둔 채 현판을 '경양서원'(鏡陽書院)에서 '경양서당'(鏡陽書堂)으로 바꾸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얹었으며, 3칸 규모의 대청 좌우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송오문집'과 '감호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1992년 6월 도난을 당했다.

◆성산 여씨가 터를 잡은 기를 마을

기를 마을은 양택(陽宅) 중 조선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명당으로 전해진다. 안동의 하회마을 등과 비교해도 조금의 뒤처짐도 없는 길지(吉地)라는 것. 기를 마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감천이 휘감아 돌며 태극의 형상을 띄고 마을은 그 중심에 자리해 있다.

더구나 마을 앞을 돌아 나가는 감천은 6개의 계곡을 끼고 있다. 성산 여씨 문중에서는 이 지형을 두고 마을 뒤 덕대산 속수봉과 앞산 연만봉의 여섯 계곡에서 내려오는 기운이 다른 곳으로 새나가지 않고 기를 마을로 흘러들어 6판서가 나온 '대 길지'라고 해석한다.

김천 신현일 기자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시 마크 넣어주세요)

김천시사

김천 종가문화의 전승과 현장(민속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여옥달 성산 여씨 김산 중파 감호공 12세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