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정의 대구, 여성을 이야기하다] 대구 첫 아동복지시설 백백합보육원

입력 2015-07-06 05:00:00

백백합보육원 아이들과 함께.(1915년)
백백합보육원 아이들과 함께.(1915년)

대구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이자 근대적 사회복지시설의 시작이었던 백백합보육원. 1915년 10월 15일 대구 성 바오로 수녀원 부설 아동복지시설 고아원이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백백합보육원이다. 당시 교우 가정에서 양육되던 30명의 고아로 시작했다.

이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대구수녀원이 설립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1911년 6월 11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 대목구(단일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관할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해 대구교구를 신설하고, 제1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를 임명했다. 이에 조선의 단일교구가 '서울교구' '대구교구'로 분리됐다.

대구교구 출범 후 드망즈 주교와 로마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인 베이드 베이야 주교 사이에 대구교구 내 수녀원 설립과 후원에 관한 구체적인 협약이 체결됐고, 드망즈 주교는 1914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총장수녀에게 수녀원 설립 허락을 공적으로 요청했다.

1915년 10월 12일, 선교사 뱅상 수녀와 3명의 수녀가 대구에 파견됐다. 수녀들이 도착한 지 3일 후인 10월 15일 대구 수녀원과 임시성당을 축성해 첫 미사를 성체강복으로 봉헌하고 입주하게 된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는 교우 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던 30명의 고아를 수녀들에게 위탁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백백합보육원이 된 것이다. 샬트르 수녀들은 특히 한국전쟁 기간 수많은 전쟁 고아를 돌봤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설립은 17세기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려는 17세기 프랑스 교회 영성의 흐름 안에서, 당시의 수도원에 갇혀 사는 엄격한 봉쇄 생활 형태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도시를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96년 샬트르 교구의 시골 마을 러베빌 본당 신부로 부임한 루이 쇼베(Louis Chauvet)와 공동창설자 마리안 드 티이 (Marie-Anne de Tilly)를 통해 이름도 없는 한 작은 공동체로 태어난 것이 바로 지금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다. 지금은 전 세계 37개국에서 4천여 명의 샬트르 성 바오로의 수녀들이 가난하고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는 1915년부터 1994년까지 '백백합보육원'을 운영하며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봤다. 백백합보육원을 거쳐 간 아이들은 1만2천355명으로, 대부분 해외로 입양되거나 시설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 해외에 입양된 사람들은 지금도 몇 줄 되지 않는 기록을 찾아 백백합보육원으로 오고 있다.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다. 수녀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그 척박한 시대, 부모를 잃은 헐벗은 아이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될 수 있었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자료 및 사진 출처-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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