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군인이었다"…『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입력 2015-07-04 05:00:00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이종각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1895년 10월 8일. 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일단의 무장 괴한들이 경복궁 담을 넘었다. 괴한들은 대궐의 구조를 소상히 알고 있는 듯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경복궁 남단의 광화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왔고, 대궐을 가로질러 대궐 동북쪽 끝에 위치한 건청궁까지 곧장 달려갔다. 국왕 일가의 침전이었다.

괴한들은 황후를 찾기 위해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마침내 장안당(長安堂)에서 명성황후를 찾아 밖으로 끌어내 살해했다. 시신을 장안당 옆 옥호루로 옮겼다가 옥호루 오른쪽 쪽문으로 끌어내 인근의 녹산(鹿山)에서 불태웠다. 남은 유해는 녹산에 매장했다.

명성왕후를 시해한 자들은 일본 낭인들로 밝혀졌다. 명성황후 시해는 대원군의 쿠데타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사건의 총 책임자는 미우라 고로 당시 주한공사라고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을미사변이다.

이 책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는 지금까지 통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책은 '을미사변은 일본 군부의 군사작전이었고, 그 범인은 일본 군인이었다'고 말한다. 근거로 을미사변 당시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 영사가 보고한 '우치다 보고서'를 비롯해, 그가 일본국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개인 서신, 그 밖의 관련자료를 제시한다.

지은이는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던 일본 정부가, 한국의 왕비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깡패와 다름없는 낭인들에게 맡겼을 리 없다. 을미사변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청일전쟁 승리로 의기양양했던 일본은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으로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돌려주게 되었고,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민 황후를 중심으로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여 들여 일본을 물리침) 정책이 시행되자, 민 황후 제거 목표를 세웠다. 을미사변을 석 달쯤 앞둔 7월 19일 일본은 육군 무장 출신 미우라를 일본 공사로 한국에 파견하고, 대본영의 지시로 부속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와 그 아래 3명의 대위, 5명의 하사관을 긴급하게 한국에 배치한다.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 습격은 낭인들이 주축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 경복궁에 난입에 동원된 일본군 장교는 10명에 이르고, 동원된 군 병력만 해도 3개 대대나 된다. 이 같은 군사작전을 펼쳐놓고도 낭인부대가 일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책은 '민 황후를 실제로 살해한 자는 경성수비대 소속 현역 군인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라고 지목한다.

책은 그 근거로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영사가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한 통의 비밀 서한을 제시한다. 사변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담은 이 편지에는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후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검사정 보고서에는 '육군사관'이라는 표현을 써 범인의 정체를 흐릿하게 만든다. 지은이는 그러나 '우치다가 하라 차관에게 편지를 보내며 읽고 태워 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는 점에서, 첫 번째 비밀 편지가 그날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을미사변 당시 경성 수비대에는 4명의 일본군 소위가 있었다. 을미사변 직후 사건에 참여했던 경성수비대 군 지휘관들이 히로시마 헌병대에 수감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미야모토 소위가 마키 특무조장과 함께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이 반복해서 나온다. 시해 현장에 함께 투입됐던 낭인들도 그 같은 증언을 한다.

일본은 사건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3일 만에 참고인 조사를 끝낸다. 그리고 1년 9개월 뒤 미야모토를 항일투쟁이 심한 타이완으로 발령한다. 미야모토는 타이완에서 교전 중 사망했다. 애당초 사망의 위험이 있는 지역으로 발령함으로써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을미사변 3개월 만에 사건의 총책임자였던 미우라 일본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참사이자,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은 사건은 그렇게 '무죄'가 되었다.

책은 '명성황후 시해범이 민간인인 낭인인 경우와 군인인 경우는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의 지휘를 받아 동원된 일본군인, 그것도 현역 장교가 시해범일 경우 일본 정부의 법적, 외교적 책임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며 '120년이 지났지만 을미사변은 다시 조명돼야 하고,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310쪽, 1만5천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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