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라의 터전 경주와 대구는 한국 다도의 출발점이자 기준입니다"
대구 차 문화의 산증인 최정수 홍익차문화원 원장
약 50㎖의 물에 담긴 3g의 잎새.
녹차는 인류 문명에 있어서, 특히 정신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다. 차 하면 참선, 다도(茶道), 명상 같은 귀족문화나 종교 의례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차 문화는 그 쓰임에 빈부나 귀천이 없었다.
삼국시대 문헌에 차에 대한 기록이 수십 차례나 보이고 고려시대엔 '차와 밥이 일상'이라는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조선시대 관혼상제 중 '차례'는 지금까지 전해져 중요한 제례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차는 밥을 먹고 숨을 쉬듯 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문헌상 차가 최초로 등장하는 공간은 경주다. 신라에서 뿌리 내린 차는 삼국통일 이후 수도 광역화에 따라 대구로 고스란히 전래되었다. 경주, 대구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출발점이고 기준인 것이다.
차문화의 중심 대구에서 평생을 다례, 다도 보급에 헌신해온 사람이 있다. 일찍이 고교 때 다도에 입문해 지역사회에 차 문화를 크게 일으킨 차샘 최정수(68) 홍익차문화원장을 만나봤다.
◆대구'경북은 한국 차 문화의 출발점
대구와 차? 언뜻 생각하면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보성, 하동처럼 차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초의(草衣)선사나 다산(茶山) 같은 차 명인을 배출한 고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 세계로 향하는 빗장을 열고 들어가면 뜻밖의 사실과 만난다.
"신라시대 승려, 귀족, 화랑도 사이에는 음다(飮茶) 풍습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에서 다도, 참선은 생활의 일부였던 셈이지요. 당시 경주와 같은 문화권이었던 대구 역시 차 문화의 중심지로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최 원장은 당과 활발한 교역을 벌여왔던 신라가 중국의 차를 먼저 받아들여 다도 문화를 선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국에서 다도 사범이 가장 많은 곳(인구 비례)도 대구라고 한다. 보통 3년 이상 교육 과정을 거쳐야 자격이 주어지는 사범이 많이 배출된다는 것은 그만큼 차 문화가 대중화되었다는 방증이다. 시내에 나가면 다구(茶具)점도 부쩍 눈에 띈다. 삼국시대 대구에 정착한 다도 문화가 조선시대 영남 선비 문화와 접목되면서 수백 년 동안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구산 스님'경봉선사 만나 다도 입문
최 원장과 다도와의 인연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고교 시절 최 원장은 이천동 수도산의 한 사찰에서 불교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 가끔씩 송광사의 구산(九山) 스님이 들러 "옜다, 약이다" 하며 던져주신 차 봉지가 차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에 해인사 일타 스님, 통도사 경봉선사와 가끔씩 차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 기회를 통해 조금씩 선다(禪茶)의 경지를 접할 수 있었다.
단순한 음용에 그치던 차에 대한 이론적 도약을 이룬 계기가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했던 최 원장은 매월당 김시습 한시, 고운 최치원 시문이나 포은(圃隱)문집을 접하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고전문학, 고문에서 차에 대한 기록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마시는 차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생활이요 일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때부터 '고문에 나타나는 차'를 화두로 문헌 연구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최 원장의 차에 대한 사랑은 모교인 능인고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면서 문화운동으로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먼저 교내 '유다회'(幽茶會)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했다. 4호까지 발간한 유다문집은 전국 최초였다. 또 차에 관심이 있는 지역의 교사들을 모아 '대구중등교원 다도연구회'를 만들어 지역의 교단에 차향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신라~조선 1천400년 동안 다도 명맥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632) 때부터 이미 차가 들어와 있었다. 흥덕왕 3년(828)에도 차 재배, 차 마시기 풍속이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차 문화가 활짝 꽃을 피운 건 고려시대였다.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의 속성상 불교의 수행과 깊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문헌을 통해서 보면 고려의 왕, 귀족, 관리는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상으로 차를 마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관회, 연등회 등 국가의례인 진차의례(進茶儀禮, 임금께 차를 올리는 의례)가 행해졌고 궁중에는 다방(茶房), 다감(茶鑑)이라는 전담 관청이 있어 차를 전문적으로 관리했다. 중국에 전해주는 예물 목록에 차가 빠지지 않았다. 사찰 주변에는 차 농사를 전담하는 다촌(茶村)이 번성해 사원과 일반 민가에 차를 공급했다.
최 원장은 그동안 고문 조사를 통해 차 문화와 관련된 속담, 경구(警句)들을 연구했다.
'차나 한 잔 하고 가게'(喫茶去) 같은 경구는 이미 고려시대 일상으로 쓰이던 화법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이 통용되는 '다반사'도 당시 생겨나 지금까지 쓰임을 유지하고 있는 일상용어입니다."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음다(飮茶) 유풍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조선 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이 가장 컸지만 명나라에 진상하기 위한 차세(茶稅) 부담 때문에 차밭 경작이 쇠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왕실, 유림에서도 차례의 명맥이 이어졌고 사원에서도 다도가 전통을 이어갔다. 일반 민가에서는 다도 때 곁들여 먹는 다식(茶食)을 위한 다식판이 보급되었고 관혼상제 때 모든 의례를 '차례'로 부를 정도로 차 문화가 전통을 이어갔다.
지구상에서 지표수를 음용수로 바로 마실 수 있는 나라는 10여 개국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마을마다 우물이 있고 산마다 계곡수가 있어 별다른 정화 과정 없이도 물을 마실 수 있다.
이런 천혜의 조건을 바탕으로 차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고 차는 한국인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차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던 지역의 차인들도 이젠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젊을 때부터 '카멜리아 시넨시스'의 향기에 취해 거의 반세기 차인의 길을 걸어온 최 원장의 소망은 단 하나다.
"한국의 차 문화는 동양 3국의 다도와 비교해 손색이 없고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 깊이에서 훨씬 앞서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차 문화는 궁극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야 합니다. 유형, 무형의 자산 가치 면에서도 충분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차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벌여나갈 것이고 그 출발점은 바로 대구가 될 것입니다."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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