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한국戰 참전 배능환 씨, 여든 넘어서야 늦깎이 인정

입력 2015-06-25 05:00:00

나라수호는 국민 당연한 의무, 세번의 지원 끝에 해군서 복무

24일 6
24일 6'25전쟁 참전유공자인 배능환 씨가 군 복무 당시를 회상하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국민이면 당연히 해야 될 의무지.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몇 번이고 전쟁터로 갔을 거야."

6'25 참전 용사 배능환(83) 씨.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한다. 6'25가 발발하자 자원해 전쟁터로 나갔고, 전후에는 가족 생계를 위해 파독 광부로 나가 3년을 지하 갱도에서 일했다. 6'25를 하루 앞둔 24일 만난 배 씨.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힘들게 지나온 삶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했다.

"전쟁이 났을 때 18살이었지. 경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다섯 동생을 돌보다 바로 전쟁터로 달려갔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았어." 징집면제를 받은 그는 군대 대신 방위대에 들어가 징집 업무를 봤다. 1년간의 징집 업무를 마친 배 씨는 다시 입대를 요청해 방위대 신분으로 인천의 한 육군 부대에 배치받게 됐다. 20여 명의 전우와 함께 도착한 인천의 모습은 처참했다.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고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텅 빈 도시에서 대기하고 있던 배 씨는 며칠 뒤 또 한 번 '귀향 명령'을 받았다. 정확한 소속이 없던 방위대란 이유로 귀환 처리가 된 때문이다.

두 번의 자원입대 실패에도 배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입대 요청 만에 해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됐고, 미 7함대 소속으로 동해안 전투에 참가했다.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휴전이 됐고 배 씨와 전우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우리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의지로 똘똘 뭉친 전우들이었는데 휴전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휴전 이후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전사해 돌아오지 못한 고향 친구들이 부지기수였고 장애를 입고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부모님과 다섯 명의 동생을 돌보는 일 또한 전쟁 못지않게 힘겨웠다. 배 씨는 "온 나라가 빈곤에 허덕였다. 전쟁 전처럼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했다"고 했다.

30대가 된 그는 파독 광부 모집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했고 독일로 갔다.

"고생이야 말도 못했지. 그래도 내 나라, 내 가족 생각하면서 버텨낸 거지. 그렇지만 전쟁도 파독도 지금도 건강하기만 하다면 언제든 참여할 거야."

어두운 지하 갱도에서 석탄가루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나라와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그를 3년이나 버티게 해줬다.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았던 배 씨는 지난해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2014년부터 정부가 참전유공자를 직접 발굴하는 일에 나서면서다. 2008년부터 국가보훈처는 6'25참전 용사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전체 90만 명 중 40여만 명이 미등록자로 남아있다. 2014년 이전에는 본인이 신청을 해야 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배 씨도 자신이 국가유공자 대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정부가 발굴에 나서면서 인정받게 된 사례다.

배 씨는 "참전 군인 대부분이 나라를 위해 복무했다는 자긍심으로 살고 있고, 뭘 바라고 참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유공자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젊은이들이 부모님 세대의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김봄이 기자 b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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