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특집] 인천상륙 하루 전…'잊힌 전쟁' 장사상륙작전 있었다

입력 2015-06-25 05:57:45

1950년 9월 장사상륙작전 과정에서 영덕군 장사해변에 좌초한 문산호. 영덕군 제공
1950년 9월 장사상륙작전 과정에서 영덕군 장사해변에 좌초한 문산호. 영덕군 제공
장사해변에 건립된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영덕군 제공
장사해변에 건립된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영덕군 제공

"육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D일 H시 P장소에 상륙시켜 동대산(포항'영덕의 경계에 있는 해발 791m의 산)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 제1군단의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군사극비 육군본부 작명 제174호, 9. 10. 16:00)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기 닷새 전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앞으로 떨어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 이름의 전문이다. 이 전문으로 '잊힌 전쟁' 장사상륙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라

6'25 남침 이후 두 달여 만에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금세 대구와 부산까지 무너질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황은 교착상태를 맞이한다. 동쪽엔 형산강 방어선이 형성돼 있었다. 형산강 방어선이 뚫리면 7번 국도를 따라 곧바로 울산'부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상황이었다.

"9월 13일 대형 LST(landing ship tank'미국 상륙작전용 함정, 선수문이 있어 병력'탱크'물자 양륙 가능)를 이용해 동해안 영덕으로 상륙,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하라."

극비 작명 174호가 떨어진 지 이틀 만인 9월 12일 육본 작전교육국장 이름의 추가 명령이 독립 제1유격대대에 하달됐다. LST 상륙 전 지구 전역에 대한 항공기 폭격과 함포 지원 등 지원 방안도 담겼다.

독립 제1유격대대는 즉시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북한군 군복과 개인당 3일치의 식량인 미숫가루 몇 봉지와 폭약'각종 탄약, 그리고 본인들의 키보다 큰 소련제 장총을 지급했다. 대원들은 8월 27일 구성돼 20일도 채 훈련받지 못한 학도의용군들이었다.

9월 13일 오전 육군본부(당시 부산) 연병장에서 육참총장까지 참석한 대대적인 출정식이 열렸다. 출정식에 앞서 자신의 머리카락'손톱'발톱 일부를 잘라 봉투에 담았다.

"부산 제4부두에 가 '문산호'에 승선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함께 승선과 하선을 몇 차례 반복하다가 미군은 철수하고 우리만 배에 올랐다. 승선 후 갑판에 오르니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한 수많은 환송객들이 우리들을 환송했다. 우리는 두려움도 잠시 잊고 들뜨기도 했다."

10대의 어린 학도의용군 772명 등 총 841명은 이렇게 부산항을 출발, 동해안을 따라 영덕 장사리로 향했다. 호위는 영국 구축함 Q34호가 맡았다. 하지만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3m 이상의 파도와 강풍이 문산호를 괴롭혔다 .

9월 14일 오전 2시 30분쯤 독립 제1유격대대를 태운 문산호가 장사리 인근 해안에 도착했다. 문산호는 50m 안까지 다가섰지만 높은 파도'짙은 안개로 육지까지 완전히 상륙하지는 못했다.

◆물고기밥보다 까마귀밥이 되라

당초 목표 지점에 배를 댈 수 없게 되자 그대로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 선수문이 열리자 파도가 휘몰아쳤고 해변의 북한군 토치카들이 불을 뿜으며 총알이 배 안으로 날아 꽂혔다. 어린 학도병들이 망설이자 부대장이 권총을 빼들었다.

"부대장은 '바다에 빠져 물고기밥이 되는 것보다 육지에 올라가 까마귀밥이 되는 것이 낫다'며 상륙할 것을 명령했다. 부대장의 총성을 시작으로 1중대 1소대부터 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중대원들은 거친 파도에 말려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적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1중대는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영덕군 '장사상륙작전백서', 참전자 증언)

그때 영국 구축함 Q34호의 함포 지원이 시작됐다. 장사해변 맞은편 고지를 난타했다. 문산호 갑판 위에 설치된 체코제 수냉식 기관총 12정과 81밀리 박격포 8문도 불을 뿜으며 적에 맞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풍랑이 점차 심해지고 북한군의 포화가 집중되면서 문산호는 함미가 파괴돼 닻이 끊어진 데 이어 배가 기울기 시작해 불과 30여 분 만에 완전히 좌초하고 말았다.

북한군의 화력이 주춤한 사이 부대장은 수영에 능한 특공조를 편성해 밧줄로 문산호와 백사장에 있는 소나무를 연결했다. 강한 파도에 휩쓸려 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학도병들은 육지를 밟는 데 성공했다.

당시 형산강을 중심으로 한국군 제3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던 북한군 5사단은 후방에 치안연대를 배치했다. 특히 적 후방지역인 장사에는 소수의 경비 병력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을 따라 구축해 놓은 토치카와 해변 인접 3곳의 봉우리에서의 박격포'직사포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6일간의 전투 그리고 철수

전투에 앞장선 지휘관들이 전사하자 학도병들은 과감한 돌격에 나섰다. 양측 간 근접 전투를 벌인 끝에 장사 해변을 장악하면서 나머지 병력도 모두 상륙을 완료하고 적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적이 고지로 후퇴하자 유격대는 해변에서 가장 가까운 남서쪽 200고지(영덕 남정면 남산)를 포위하고 집중 공격했다. 14일 오후 2시 50분 문산호가 장사해변에 도착한 지 12시간여 만에 200고지는 아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제1유격대대는 이어 200고지 동남부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장사해변 주변 반경 10여㎞의 북한군을 소탕하고 포항'영천 방면으로 통하는 7번 국도를 완전히 장악,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장사상륙작전 하루 뒤인 15일 오전 6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감행됐지만 유격대대는 장거리 통신장비 두절로 외로운 전투를 벌여야 했다.

뒤통수를 맞은 적군은 유격대 상륙 사흘 만인 17일 탱크 4대와 2개 연대를 동원해 반격을 시작했다. 탈진'식량 부족'통신 두절 등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장기전을 치를 수는 없었다. 문산호가 좌초돼 돌아갈 수도 없었다.

18일 부대장은 포항 방면 아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부대는 도로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엔군 정찰기가 유격대대를 발견했다. 곧이어 도착한 헬기로 부대장이 유엔군 해군에 구조를 요청해 19일 LST조치원호가 오전 6시 장사해변에 도착했다. 학도병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조치원호는 풍랑으로 육지 30여m 앞까지밖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이번에도 로프를 연결해 철수작전이 벌어졌다. 유엔군의 함포와 항공기 폭격이 있었지만 적의 공격은 집요했다. 오후 3시까지도 구조작전이 끝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조치원호의 일부가 파손되고 갑판의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작전을 지휘했던 유엔군 피어드 소령은 유격대대 부대장의 만류에도 로프를 끊고 해변을 떠났다. 해변에 30여 명의 학도병들을 남겨두고였다.

조치원호는 20일 오전 6시 부산항에 입항했다.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당한 8일간의 장사상륙작전은 이렇게 끝났다.

영덕 김대호 기자 dhkim@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