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와 복지가 우리 경제 '옳은 쪽'…정부·여당에 의지 있는지 의문"
우리 시대의 지성인.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으며, 끊임없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앞장서 주장해 온 행동하는 학자이기도 한 경북대 경제통상학과 이정우(65) 교수가 지난 11일 마지막 퇴임 강연을 끝으로 38년 교단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강연의 주제는 늘 그가 강조했던 것처럼 '불평등의 경제학'. 그가 쓴 책 제목이자 마지막 학기 강의 타이틀이기도 했다. 퇴임 강연을 고작 1시간 앞두고 이정우 교수를 만났다. 발 디딜 곳 없이 책이 가득 쌓인 방은 그가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활동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교수는 특유의 인자한 웃음으로 "시원섭섭합니다. 이제 학생들에게 젊은 에너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은 좀 아쉽네요"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최근 기사 중 "우리 경제 '오른쪽'에서 '옳은 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 참 감명 깊었다. 과연 '옳은 쪽'이란 무엇인가?
▶우리 경제는 50년 동안 성장지상주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시장만능주의까지 더해져 보수적으로만 기울어져 있다. 이 두 개의 사상이 분배와 복지를 밀어내고,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게 만들었다. '옳은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회적으로 더 이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여야 한다. 정치와 제도적으로 변화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지금의 정부 여당은 그런 분배와 복지를 추구할 생각이 없는 것이 문제다.
-복지 강화는 '세금 인상'이 동반돼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금 인상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로 기본 틀을 바꿔야 한다. 선별적 복지라는 것은 내가 낸 세금으로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혜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그 혜택을 직접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내가 낸 세금은 내가 누리는 무상 교육, 보육, 노인 요양 등 각종 혜택이 직접 내게 돌아온다. 기본적인 생활에 관련된 상당 부분의 사회 서비스가 탈(脫)상품화된 사회다. 피부로 혜택을 체감할 수 있다 보니 유럽 복지국가의 국민들이 50%에 육박하는 엄청난 세금을 내면서도 조세 저항은 오히려 우리보다 낮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문제가 커지기만 하는 것인가.
▶불평등은 시장에서 주로 발생한다. 이 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정부다. 하지만 정부가 양극화를 줄이기 위한 노력에 손을 놓고 있다. 정부를 통한 불평등 축소 효과가 선진국은 40% 수준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고작 8%에 불과하다. 노조의 활성화와 경영참여 도입, 기업공개와 종업원지주제 확대, 임금격차 축소, 부와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 서민 주택의 개선, 교육제도의 개혁, 사회보장 확충 등의 정책이 시급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1998년 이후 급작스럽게 불평등이 심화된 근본 원인을 찾을 수는 없나?
▶부동산 가격의 급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토지 가격 급등의 원인은 일본식 토건국가를 지향한 박정희식 발전 모델의 결과다. 역대 정권의 지가 상승 기여도를 분석한 결과 박정희 집권 16년(실제 18년이지만 2년치는 자료가 없음) 동안 50.5%가 상승한 데 비해, 비슷한 기간인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15년) 동안에는 고작 1.5% 상승하는 데 그쳤다. 토건국가는 단시간에 고성장이 가능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우리도 이렇게 가면 제2의 일본이 될 것이다.
-시민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2013년 고려대생이 사회문제를 다룬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 혹은 월가에서 확산된 '1대 99' 시위 등이 벌어질 때는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었다가도, 정작 바뀌는 것이 없었다.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심과 이타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이 쉽게 표출되도록 만들어진 구조이며, 특히 한국사회의 제도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기심을 줄이고 이타심이 확장될 수 있도록 사회제도와 게임의 규칙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던 운동들이 단지 이벤트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정책 법안으로 만들어지도록 논의를 이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정책 법안으로 만들어지고 나면 후퇴하기 어렵다. 한국 사람은 냄비근성이 강하지만 문제 해결 능력과 역동성이 높아 희망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낙관주의적으로 본다.(웃음)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지적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고, 지난해 피케티 열풍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자본주의는 성장의 역동성과 불평등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여기서 불평등이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는 성장과 분배를 적절히 조화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여유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2019년 고령사회,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가 되는 등 세계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2050년에는 세계 제2위의 노인 국가가 된다. 1위는 일본이다. 토건국가였던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는 거다. 이것은 '복지'를 무시한 결과다. 복지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애 낳고 키우기가 너무 힘들었고, 출산율이 하락했으며, 이제 그 부메랑을 얻어맞는 거다.
-지난해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이란 책을 공동번역하고 해제를 실었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 사례는 빠져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사례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고 들었다.
▶쿠츠네츠의 역U자 가설은 경제성장 초기단계에는 불평등이 악화하지만, 성숙단계에 들어가면 소득분배가 개선된다는 것인데, 최근에는 이를 뒤집는 실증연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피케티의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피케티는 한 나라의 자본 총량을 분자, 국민소득을 분모에 놓은 베타(β)값을 분석했다. β값이 높을수록 자산에서 많은 소득이 발생해 불평등이 계속되는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쉬운 것이다. 그는 과거 전 세계적으로 β값이 감소했다가 다시 증가하는 U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현재 β값이 제일 높은 나라가 이탈리아와 일본이었는데 7이 안 됐다. 하지만 몇몇 경제학자들이 한국에 대해 계산을 해보면 7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로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셈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갑질'이다. 개인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있어서도 문제적 요소가 아닌가.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고 갑질만 있다. 최근 갑자기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오랜 뿌리가 있다 보니, 역사적으로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런 태도는 남에 대한 이해 없이 내 것만 중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훨씬 각박해지고 제 몫 챙기기가 심해졌다. 갑은 괜찮지만 을은 살기가 팍팍한 나라가 됐다. 나는 우리나라의 해방 후 역사를 쓴다면 1998년 이전과 이후로 갈라 써야 한다고 본다. 불평등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실업난이 시작됐으며, 정리해고'구조조정'민영화'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하는 데 대해 '폴리페서'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간에서는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폴리페서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며, 이에 자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바꿔 말하면 사대부(士大夫)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역시 학자이면서 정치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는 단어다. 이율곡도 그러한 의미에서 폴리페서였고, 이황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생각해 본 바는 없지만 지금까지 해 오던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과 대중을 상대로 강의 등은 이어나갈 생각이다.
-38년 교수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강의다. 학생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마디는 무엇인가.
▶지금의 학생들은 취업 전쟁으로 고충을 겪으면서 스펙 쌓기에만 매몰돼 있다. 눈앞의 이익도 중요하긴 한데 젊은이들은 좀 더 멀리 보고 천천히 간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이라는 말을 좋아해서 즐겨 사용하는데, 학생들도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져줬으면 좋겠다.
한윤조 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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