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국가 브랜드 된 '피아노의 시인' 쇼팽

입력 2015-06-10 05:00:00

'피아노의 시인'이란 별명을 가진 쇼팽(1810~1849)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1829년 연주 여행을 위해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는다. 파리에 정착한 후인 1831년 끝내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은 바르샤바 함락 소식을 접한 심적 충격을 표현한 작품이다.

1832년 파리에서의 연주회가 성공해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 문제로 둘은 헤어졌다. 쇼팽은 1838~1839년 겨울 혹독한 추위 때문에 얻은 폐병이 급속도로 악화됐지만,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 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자적인 행보를 계속하다가 1849년 사망하였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십자가 교회에 있는 기념비에 묻혔다.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었음에도 그는 내면적으로 폴란드를 조국으로 사랑한 애국자였다.

쇼팽의 정신적 내면에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깔려있지만, 쇼팽이라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상드와의) 사랑'이며, '피아노의 시인'이란 별명이다. 폴란드는 이러한 '쇼팽이미지'를 국가적 브랜드로 만들어 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27년 창설 이래 5년마다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피아노 콩쿠르인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와 '폴란드국립쇼팽음악대학교'(바르샤바쇼팽음악원)이다. 수많은 음악학도가 쇼팽을 배우기 위해 폴란드로 모이고, 쇼팽 연주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폴란드로 간다. 쇼팽은 죽은 후에 더 팔팔하게 살아서 지속적으로 조국에 영광을 선물하고 있다.

지난달 12일부터 21일까지 계명대 계명아트센터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태평양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는 3년마다 '쇼팽의 사랑'과 '민족정신', '피아노를 위한 쇼팽의 시(詩)'를 노래하는 피아노 콩쿠르이다. '바르샤바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와 연계된 국제적인 행사이다. 이 대회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13개국에서 참가 신청을 하였다. 예선을 거쳐 12개국 97명(주니어부 42명, 시니어부 55명)이 피아노 독주로 본선 경연을 펼쳤고,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결선에서 관현악과 함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모든 연주가 공개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인 이 행사는 특히 대구의 음악애호가들에게 국제콩쿠르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귀한 기회이다. 하지만 홍보 부족의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필자에게는 한 천재 예술가가 국가에 주는 유익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기회였다.

작곡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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