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하의 영국 여행 길라잡이] '세기의 로맨스' 품은 城

입력 2015-06-02 05:00:00

히버성의 접견실
히버성의 접견실
불후의 명화 \
불후의 명화 \'천일의 앤\'의 여주인공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친모 앤 불린의 친정 히버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들이 선전하는 리즈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들이 선전하는 리즈성.
영국 작은 성 지도
영국 작은 성 지도

헨리 8세가 즉위한 1509년으로부터 그의 딸로 후사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1603년까지의 약 100년간 만큼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많이 간직한 시기는 영국 역사에서 없다. 특히 헨리 8세가 6명의 부인을 차례로 갈아치우는 과정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도 전무후무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얘깃거리다. 헨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해 첫 번째 부인인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감행한다. 여기서 감행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럽 최강국이었고 가톨릭 교황청 바티칸은 바로 스페인의 직접적인 영향력 안에 있었으니 스페인 공주 출신 부인과의 이혼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거의 자살 행위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이혼으로 헨리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바티칸 가톨릭 교황청과 결별, 영국 성공회를 창설하고 자신이 그 수장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나게 큰 역사적인 사건으로 번진 캐서린과의 이혼과 앤과의 결혼도 5건의 연이은 결혼'이혼과 처형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래서 헨리 8세 이야기는 영국 영화나 TV드라마의 단골소재이다. 그 드라마의 주무대였으나 영국 바깥에서는 잘 안 알려진 히버성과 리즈성 두 곳을 이제부터 찾아가보자.

두 성은 모두 런던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히버성은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성이다. 성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좀 큰 저택 정도로 보면 딱 맞다. 성의 사방에 지금도 물이 채워진 해자(垓子)가 파여 있어 작은 연못 위에 뜬 성처럼 보인다. 이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궁에 캐서린 왕비의 말벗으로 불려 들어갔다가 헨리의 눈에 들어 사랑을 나누게 된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잉태하고, 그것을 빌미로 헨리를 졸라 캐서린을 폐위시키고 왕비 자리를 차지한다. 캐서린은 나중에'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 이름으로만 남은 메리 1세 여왕이 된 맏딸 메리밖에 낳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앤 자신도 딸 엘리자베스밖에는 못 낳는다. 그나마 캐서린은 이혼을 당하고 쫓겨나는 데 그치지만, 앤은 남동생과의 근친상간이라는 누명을 덮어쓰고 런던 탑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맞는다. 정말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의 단초가 이 성에서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앤 불린의 이야기는 흘러간 명화'천일의 앤'에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천일의 앤'이라는 이름은 앤이 여왕으로의 나날을 1천일밖에 못 누린 데서 연유한다. 헨리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앤 볼린이 낳은 막내딸이 영국 역사상 최고의 통치자가 될 줄 정말 몰랐을 것이다. 만일 남동생(6년 재위)이나 언니(5년 재위) 중 한 사람이라도 오래 살았으면 엘리자베스는 여왕은커녕 목숨도 제대로 부지하지 못했을 터인데 말이다. 히버성은 현대에 들어와 미국 호텔 재벌 아스토리아 가문 일원의 소유로 있다가 지금은 부동산 회사가 호텔과 회의 시설로 관리하고 있다. 튜더시대 성답게 실내가 아기자기하고 천장이 나지막해서 아늑하고 포근하다. 운치 있는 역사적인 시설에서 오붓한 신혼을 보내고 싶다면 이만한 곳이 없다. 물론 손님을 맞는 호텔은 섬뜩한 역사가 얽힌 성이 아니라 나중에 지어진 성 뒤쪽 튜더식 별채건물이다.

이제 발길을 리즈성으로 돌리자. 리즈성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성'이라고 마케팅한다. 리즈성은 히버성 보다는 좀 더 크고 천장이 더 높다. 히버성은 귀족의 성 그것도 하급 귀족의 성이었는데 비해 리즈성은 명색이 왕의 소유여서인지 나름대로 위엄을 더 갖추고 있다. 해자를 파서 나중에 물을 채운 히버성과는 다르게 리즈성은 제대로 된 호수 안에 지어져 있어 도개교(跳開橋)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다. 리즈성은 히버성보다 역사도 거의 두 배는 된다. 1119년에 지어진 이후 헨리 8세는 캐서린을 위해 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이 성에서 자주 거주했다. 서로 51㎞밖에 안 떨어진 두 성이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연관되어 있는 점도 참 흥미롭다. 지금은 이 성도 영국 귀족 소유로 되어 있다. 영국 귀족들의 사는 방식이 궁금하면 이 두 성을 와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런던에서 65㎞, 차로 1시간 거리이니 런던 방문 중에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난다면 한번 다녀와 볼만하다.

리즈성은 매년 7월 저녁에 열리는 야외 클래식 연주회도 유명하다. 올해로 37회째를 맞는 음악회의 마지막 곡으로는 전통적으로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 연주된다. 굉음의 대포가 터지고 불꽃이 수놓는 밤하늘의 광경은 장관이다. 매년 평균 1만여 명이 아침부터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들어와 전을 펴고 온종일 즐긴다. 심지어는 하인까지 대동하고 와서 흰 식탁보를 깔고 정식으로 즐기는 등 영국 중산층의 여유로운 삶의 한 자락을 엿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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