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가슴에 묻어둔 한 마디

입력 2015-05-28 05:00:00

김상민(대구 북구 동북로)

새로 시작한 일이 잘 안 풀려서 사방이 암흑천지 같았던 어느 날 동창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20대 후반에 공연의 '공'이 뭔지도 모르는 채 문화계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5년 뒤, 제법 큰 기획사에서 기획을 하던 그는 공연기획자로 홀로서기를 단행했다. 선배들이 그에게 독립할 자금을 마련하라며 유명 가수의 콘서트를 맡겨주었다.

그 가수는 20대부터 40대까지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었던 덕분에 모두들 대박을 낼 것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그래서 친구는 지인들의 돈을 몽땅 콘서트 준비자금으로 쏟아부었다. 결과는 쪽박.

핸드폰 요금도 빌려서 내야 하던 시절이 계속되었다. 무일푼이 된 채 형 집에 들어갔다. "큰소리 탕탕 치고 나왔는데 다시 남의 회사 말단으로 찌그러져야 하나…." 한숨이 늘고 줄담배가 계속되는 시절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다. 하루는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는 그는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는 영화대사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 독을 품었다. 절치부심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회사가 기획한 퓨전 공연으로 다시 햇볕을 쬘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그가 만든 크고 작은 공연들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회사도 성장했고, 그도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그가 막잔을 마실 때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는 말을 나는 곱씹을 수 있었다.

하던 일이 잘되어서 사람들을 피해 다닐 때였다. 수면유도제가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날들이 10개월을 갔다. 잠을 자다가도 두 시간마다 경기가 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야 할 정도로 가슴에 맺힌 한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내가 잘나갈 때는 그렇게 아양을 떨던 사람들이 하나둘 소식을 끊어갔다. 험담을 하는 게 잘 때마다 들리는 거 같았다. "사람이 변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속에 맺힌 독을 빼내려고 미친 듯이 동네를 뛰어다녔다. 그때 내 상처 입은 청춘을 보듬어준 말이 다시 떠올랐다.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20대에는 성공한 뒤에 찾아올 축제에 취해 앞만 보았던 것 같다. 나이 40을 넘기니 승리와 성공이 동시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좌절의 시간을 버티고, 손가락질도 못 본 체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홀로서기'이고, 그 자체가 이미 '살아남아 승리'하는 것임을.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여니, 지름길이 보인다. 오늘과 다른 내일의 태양처럼. 오늘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되려고 동성로의 매서운 바람을 맞는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