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진자리, 그리고 마른자리

입력 2015-05-21 05:00:00

기업을 경영하는 고교 선배를 얼마 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최근에 식겁했다"고 했다. 속마음으로 '요즘 세무조사가 많다는데 선배님이 세무조사라도 받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선배는 딴소리했다. 비행기 탄 얘기였다.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날아가는데 만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탔어. 이코노미석에서 30시간 가까이를 버티려니 정말 힘들더구먼." 선배는 경산시 무역사절단의 일원으로 지난달 지구 반대편 남미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외국 회사와 합작법인을 갖고 있고, 해외법인도 둔 그 선배는 해외 출장이 잦다. 쌓아놓은 항공 마일리지만 이용해도 좌석 승급을 통해 비즈니스석을 충분히 탈 수 있건만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이유는 동행한 최영조 경산시장 때문이었다.

선배에 따르면 최 시장은 이코노미석을 발권했다. 이 때문에 함께 간 기업인들은 비즈니스석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기자가 알아보니 인천공항에서 브라질 상파울루를 오가는 이코노미석 항공권 가격은 430여만원. 비즈니스석을 타면 이코노미석 가격의 3배 이상을 더 얹어줘야 한다. 최 시장은 시장 개척 활동에 나서면서 경산시 곳간에서 나갈 돈 1천만원 가까이를 줄여준 셈이다.

선배는 "힘들어 죽을 뻔했다"는 말을 연거푸 했지만, 이번 무역사절단 참여를 통해 공무원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꾼 눈치였다. 대놓고 "대단한 분이다"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직책이 '장'(長) 자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흔들린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공무원 여비규정상 기초자치단체장은 비즈니스석을 탈 수 있지만 그 권리를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좁고 불편한 이코노미석에 앉아 수십 시간을 비행한 '이상한 행동'을 본 때문이 아닐까?

공무원들의 비행기 자리 욕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있었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이후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1년 동안 해외 출장을 갔던 직원 558명을 상대로 조사를 벌이자 항공기 좌석 승급 혜택을 받은 37명이 적발됐다. 항공사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의 권한을 이용, 항공사에 대해 자리 갑(甲)질을 한 것이다.

이곳 4급 공무원은 웬만한 기업인도 평생 구경하기 힘든 일등석을 승급해 탔다. 일등석은 좌석 면적이 이코노미석의 6.5배나 되고 기내식도 애피타이저'샐러드'주요리'디저트 등의 코스 요리가 쏟아져 나온다. 공무원 중에서는 장관급 이상만 탈 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미국 서부까지 날아간다고 치면 일등석은 이코노미석의 5배 가까운 항공료를 지불해야 한다. 감사에 걸린 4급 공무원은 1년 사이 세 번이나 일등석을 이용했다.

그뿐만 아니다. 이곳 5급 공무원도, 7급 공무원도, 좌석 승급과 관련해 부적절한 행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해외여행이 글자 그대로 일반화하고,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동의 국경 간 이동도 활발해지면서 비행기를 타느냐가 아니라, 어떤 좌석에 앉느냐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이코노미석은 단순히 좁다는 불편뿐만 아니라 때로는 몹시 무례한 승객과도 벗 삼아 오랜 시간 인내심을 갖고 버텨야 하는 공간이 된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공무원들의 갑질이 비행기 좌석에서도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비행기 자리에 대해 한마디 한 적이 있다. 지난해 여름 국회 혁신 방안 중 하나로 의원 외교 때 비행기 이코노미석 사용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1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 소속 의원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제안을 수용하고 실천 중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다. 국회의원도, 일반 공무원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힘 가진 사람들이 좋은 자리, 마른자리를 내놓고 진자리에 앉는 것 말이다.

경산시장 얘기는 반가웠다. 남들이 안 하는 일, 아니 못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보도자료로 접한 것이 아니어서 기자에겐 더 신선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