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드물고 차량 통행이 적은 새벽 시간에 섬유공단의 한 원단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2층짜리 샌드위치패널 건물 원단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는 하필이면 최초 발견도 늦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선착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창고 2층 전체에 화염이 가득했고 유리창 파편이 흩날려진 채 창문으로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소방공무원으로 임용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 이 정도 규모 화재현장은 처음이었다.
십수 년의 경력이 쌓인 반장님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불의 강도와 기세를 파악하기 바빴다. 이윽고 팀장님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호스를 풀어 1층 출입구 계단을 통해 진입, 2층 출입구에서부터 성난 화염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2층 출입문으로 뿜어져 나오려던 웅장한 화염은 베테랑 관창수의 기에 눌려 차츰차츰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나는 이때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관창 보조로 화재 진압에 참여했는데, 생전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열기로 온몸이 달아올랐고 그에 따른 긴장으로 인해 호흡이 가빠졌다. 뜨거운 열기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화세가 어느 정도 진정될 즈음, 대기조와 교대하여 후방으로 물러나 공기호흡기의 탱크를 교체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래, 바로 이 기분, 이거였다. 나를 이곳에 있게 한 이것.
때는 강원도 군 복무 시절, 제대를 3개월 정도 남겨둔 2005년 어느 겨울날이었다. 내가 속해 있던 지원중대는 여느 때처럼 야간 조명탄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날 조명탄 사격 훈련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나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야, 큰일 났다. 비상! 비상!"
소대장님의 낯빛이 갑자기 변했다. 한 발의 조명탄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채 산 중턱에 떨어져 희미한 불빛을 내더니 차츰차츰 불꽃이 커지는 것이었다. 조명탄 불꽃으로 인해 산불이 난 것이다. 게다가 그날은 날씨도 춥고 건조했다. 2개 대대 병력이 비상 동원되어 삽과 등짐펌프, 갈퀴를 들고 산으로 달려갔다.
약 2㎞ 정도 달린 것 같다. 전력질주를 하듯 달리고 달려 우리 병사들이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공무원들이 소방호스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이어서 등짐펌프를 짊어지지 않은 병사들은 소방공무원들을 도와 연장된 소방호스를 일정 간격으로 허리춤에 쥐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체력에 무리가 와 숨이 턱까지 차올랐었다. 참고로 나는 그때도 체력은 나름 좋은 편이었다.
그렇게 소방호스를 끌어올려 여기저기에 번진 불길에 점점 가까워졌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이지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그곳으로 다가가 진화를 시작하는 소방공무원들의 행동에 힘입어, 우리 병사들은 불길을 삽으로 두들기고 흙으로 덮어 산불 진화작업을 했다. 다행히 산불은 크게 번지지 않았고 진화작업을 시작한 지 2시간 정도 만에 완전히 진화가 되었다.
그때, 그 기분. 힘들고 두려우면서도 그에 맞서는, 그리고 뒤에 찾아오는 안도감과 성취감.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그날의 감정들에 매료되어 나는 소방공무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제대 후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두고 진로를 바꾸어 소방공무원이 되는 길을 찾아 그로부터 4년 뒤 소방공무원으로 임용됐다.
서장님까지 현장 지휘를 하신 규모의 원단창고 화재는 진압활동이 잘 이루어져 인명피해와 연소 확대 없이 무사히 진화됐다. 그날도 그렇게 화재현장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요즈음 안타깝게도 유난히 사건, 사고, 화재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예외 없이 우리 소방공무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 소방공무원들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나라가 재난 없는 나라,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와 동시에 사건, 사고,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를 대비해 늘 현장으로 달려갈 준비를 한다. 그 무리들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숨이 차고, 두렵고, 위험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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