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하의 영국 여행 길라잡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

입력 2015-05-12 05:00:00

깎아 지른 듯한 하얀 절벽…도보여행자들의 천국 '비치 헤드'

#영국인 3대 휴양지 중 한곳

#가장 아름다운 도보코스 각광

#요절한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영감 깃든 몽크 하우스도 볼만

런던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을 차로 내려가면 영국의 남해 바다를 만난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들르는 잉글랜드의 남부 시골 마을들에서는 시간이 멈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집들이 세워졌던 그 시절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삶이 거기서는 그냥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절박하고 각박한 세상에 그런 마을들은 속해 있지 않은 듯하다. 수백 년은 되었음 직한 나지막한 집과 반질반질하게 손이 간 정원에는 어느 계절에 가도 온갖 화초가 만발해 있다. 열 채도 안 되는 마을 상점들은 구멍가게라고 불러야 마땅할 크기이고 창문 진열장에는 아기자기하게 물건들이 장식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대낮인데 마을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 시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무엇으로 밥을 먹고 사는지가 이런 마을을 지날 때마다 정말 궁금하다. 가끔 주인 모르게 산책 나온 개들만 하품을 하면서 마을 가게를 기웃기웃하는 길손들을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마을들이 영국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들이라니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신비스럽도록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과 들판과 언덕의 3개 주군(州郡'county)인 서리, 켄트, 서섹스를 나는 영국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영국 남해에서 가장 유명한 브라이턴(Brighton)은 해외로 아직 여행을 가지 않으나 기차여행이 시작되던 빅토리아 시절(1837~1901년)에는 잉글랜드 북서부 바스(Bath), 블랙풀(Blackpool)과 함께 영국인의 3대 휴양지였다. 특히 브라이턴은 갓 결혼한 부부의 신혼여행지였다. 영국 해변가에는 항상 있기 마련인 높고 크고 길게 바다로 들어가게 지어진 목조부두(pier)가 있다. 브라이턴에도 부두가 두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하나는 불이 나서 바다 중간에 무슨 설치미술처럼 앙상한 기둥들의 구조물로만 남아 있다. 그런 곳에는 항상 싸구려 기념품과 잔돈푼을 노리는 사행성 게임기, 얄궂은 그림이나 내용의 엽서와 발행된 지 상당히 오래된 듯 염가로 파는 각종 사진집들을 파는 가게들과 함께 패스트푸드점들이 손님들을 부른다. 이런 부두에 오면 영국인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나들이 와서 아이스크림 먹었던 어릴 때나 친구들과 낄낄거리면서 배회하던 십 대 시절에 대한 진한 향수를 누구나 느낀다. 그래서 끝이 언제 날지 모를 정도로 오래가는 경제불황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영국인들이 다시 국내여행을 하기 시작하는데 브라이턴도 요즘 다시 뜨는 관광지 중 하나다.

이제 브라이턴 해변을 오른쪽으로 끼고 드라이브를 시작하자. 목적지는 깎아 지른 듯한 하얀 절벽으로 유명한 비치 헤드(Beachy Head)이다. 162m의 절벽은 정말 흰 페인트를 칠한 듯 완벽한 백색이다. 절벽 끝에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다. 철조망도 가드레일도 없다. 정말 바람 불 때 균형을 잘못 잡으면 그냥 끝이다. 그래서 투신자살 사건이 자주 일어나지만 그래도 아무런 장치가 없다. 영국인들이 자살 장소로 가장 아름답다고 칭하는 경치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 비치 헤드를 브라이턴에서 그냥 차로 휙 달려오면 정말 기막힌 경치를 놓치게 된다. 이 길을 제대로 보려면 브라이턴과 비치 헤드 사이에 있는 시포드에서 내려 해변 길(20㎞)을 걸어서 와야 한다. 쉬지 않고 마냥 걷는다면 5시간에 오지만 누가 이 길을 그냥 달리듯 오겠나? 멀리 보이는 비치 헤드와 중간의 칠자매라고 불리는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 절벽을 보면서 그냥 걸어오는 사람은 없다. 반드시 경치를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앉아서 조용하게….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나온 삶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서 영국 도보여행자들이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도보 코스를 걸어야 한다. 종착지 비치 헤드 언덕에는 펍이 있다. 그곳에서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시면' 시인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처럼 우리 '인생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깃든 '몽크 하우스'를 한 번 들러보자. 별로 멀지 않다.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로드멜이라는 인가가 10채도 안 되는 정말 조그만 마을에서 울프 부부는 결혼 7년 뒤인 1919년부터 1941년 버지니아가 자살할 때까지 22년을 같이 살았다. 그러고도 심신이 병든 아내를 평생 옆에서 돌 본 순애보의 전형 남편 레너드 울프는 이집에서 1969년 죽을 때까지 28년을 더 살았다. 집 안은 흡사 버지니아 울프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로 보존하고 있다. 하얀 침대보가 씌워진 그녀의 창가 싱글 침대가 그렇게 외로워 보였다. 왜 우리는 비극적인 삶에 더 인정을 느끼는 걸까? 왜 요절한 천재, 자살한 여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영웅의 삶은 언제나 그칠 줄 모르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가?

이왕 온 김에 근처에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 바네사 벨의 집인 찰스턴 팜 하우스도 들렀다 가면 금상첨화이다. 차로 20분 거리다. 화가였고 실내 장식가였던 안주인이 구석구석 잘도 장식과 치장을 해 놓았다. 벽이나 문 하나도 그냥 두질 않았다. 모든 곳에 채색이 되어 있다. 이집이 바로 유명한 블룸즈버리 그룹의 주말 토론 장소였고 숙소였다. 울프 부부와 언니 벨 부부를 비롯해 블룸스버리 그룹의 '개방결혼'(open marriage)의 난장판이 여기서 벌어졌다. 아무리 세기말적인 분위기의 사회였다고는 하지만 참 대단하다는 감탄 내지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시 '홈 카운티'(Home County)와 '사우스 다운스'(South Downs)라 불리는 이 지방의 평화를 누리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휴일 오후 점심 뒤 훌쩍 드라이브 나와서 시골 마을 펍에서 차 한 잔에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단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사치가 내가 영국에서 '유형생활'을 하는 보상이다. 버지니아 울프 몽크 하우스 바로 앞에 그런 펍이 있음은 참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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