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추문(醜聞)을 인정하면서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표현했다. 그러자 저명한 부흥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크 그레이엄은 월 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이렇게 비판했다. "클린턴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죄를 인정하고 모호한 언행을 삼가야 한다. 성경대로 하자면 대통령은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간통을 저질렀다."
간통의 클린턴식 표현을 '더블 스피크'라고 한다. 이는 '이중의 의미를 통해 가치체계의 전도를 일으키는, 사실상 속임수에 해당하는 언어유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84'에 그 말은 없다. 대신 'doublethink'(이중사고)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인간의 사고를 조종하기 위해 '빅 브라더'가 구사하는 언어정책의 수단이다. 소설의 가상 무대인 초강대국 오세아니아 정부 청사에 걸린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더블 스피크는 오웰의 신종 조어(造語)에 영감을 받아 1950년대에 출현한 '집단 창작'의 결과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더블 스피크는 정치인들이 특히 선호하는 속임수이다. 미국 국무부가 '살해'를 '불법적이거나 자의적인 생명의 박탈'로, 테러 용의자에 대한 고문을 '정보 획득을 위한 특이한 방법'(CIA)이나 '공격적 심문'(미국 정부)으로, 미 국방부가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 피해'로 각각 표현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도 이런 사례는 널려 있다. 이명박정부 때인 2009년 청와대의 지시로 정부나 지자체 공문서에서 '신 빈곤층' 대신 등장했던 '위기 가정'이란 표현도 그중 하나다. 당시에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신 빈곤층'이 늘어났는데 '위기 가정'은 그런 현실을 호도하려는 것이었다.
여야의 공무원연금 개악 합의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차차선의 선택',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가 '사회적 합의'라고 한 것 역시 전형적 더블 스피크다. 공무원 표를 의식한 정치적 야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정치인의 말은 절대로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명료한 언어의 대적(大敵)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대듯이." 언어의 타락에 대한 오웰의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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