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항변

입력 2015-04-22 05:00:00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지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2천 년이 넘도록 인구에 회자한다. 기원전 399년,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고발인과 배심원들에게 한 항변과 연설을 재현한 작품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법정에 세운 고발인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배심원들에게 선처를 부탁해 비켜갈 수도 있었던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삶보다는 정의로운 삶을 택했고, 살아서 침묵하기보다는 죽어서 일깨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진술은 자신을 고발한 내용에 반박하며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는 '변론'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인 삶과 혼란한 당시 사회에 대한 애정어린 '항변'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지금껏 인류의 지성사를 밝히는 철학자로 남은 이유이다.

명운과 득실이 엇갈리는 순간에 자신을 위한 변명과 항변을 늘어놓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고,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다.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남긴 파인 김동환의 시 '웃은 죄'는 항변의 낭만적 변주이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리고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길을 묻는 낯선 나그네에게 물 한 바가지 떠주고 슬쩍 웃음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여인의 처신을 문제 삼았다. 평양성까지 들먹이며 에둘러 변명하는 모습이 좀 수상쩍지만, 그래도 여인이 밉지 않다. 웃은 사실을 제바람에 실토해버리는 순박성 때문이다. 세인들은 외로운 여인네의 속내를 얼추 읽었지만, 웃은 죄밖에 없다는 과장된 항변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우리 정치판이 요동을 치고 있다. 준 사람의 메모와 장부 그리고 목소리까지 남아있는데, 받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의 눈에는 그 시커먼 속이 훤히 보이는데도 뻔한 변명을 이어간다. '일면식도 없다' '몇 번 만났지만 받지는 않았다' '보좌관이나 가족이 받은 모양이다' 대충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국민은 그게 더 밉다. 소크라테스처럼 위대한 면모는 아니더라도, 여인네의 인간적인 정서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죄가 덮어지거나 처벌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 나라 정치인들의 변명은 너무 구차하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