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첫 방폐장 계획에 郡 전체 반대, 2003년 후보지 선정, 靑 농성도
영덕군은 20여 년 전에 이미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두고 여러 차례 심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제대로 된 여론 수렴 없이 군수가 찬성하면 찬성으로, 반대하면 반대쪽으로 군민여론이 왔다갔다했던 과거를 갖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역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번 신규 원전 건설 문제도 과연 과거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인가에 주민들의 고민이 깊다. 주민들은 지난 세 차례의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 사태를 거울삼아 원전 건설 여부를 떠나 지역 갈등이 더 이상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989년 우리나라 최초의 방폐장 계획이 수립되자, 영덕군 전체가 들고일어나 반대운동을 벌였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면 단위 집회에 3천여 명이 모이기도 했고, 7번 국도를 점거해 교통을 마비시키는 등 반대 투쟁이 격렬했다. 이어 지난 2003년에도 정부가 252차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영덕'울진'영광'고창 등 4개 지역을 방폐장 후보지로 지정하자, 주민들은 상여 시위와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며 강력하게 저항했다.
두 번의 방폐장 반대시위가 불붙을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당시 김우연 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혐오시설을 영덕에 둘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하고 반대운동을 묵인하거나 지원했기 때문이다.
'방폐장 반대가 곧 고향사랑'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달 초 군의회 원전특위에서 벌인 원전 주민여론조사에서 주민들의 58.8%가 원전 건설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도 이런 과거사와 무관하지 않다. 40대 이상 주민들의 상당수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영덕군민들은 지난 2005년 또다시 방폐장 논란에 휩싸였다. 정부가 엄청난 지원금을 제시하며 방폐장 건설을 추진하자, 영덕'경주'삼척'군산 등 지자체가 유치신청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김병목 군수가 적극적인 유치 의사를 표명하면서 공무원들이 유치운동에 동원됐고, 주민들을 찬성 쪽으로 유도하는 새로운 양상이 벌어졌다. 2003년에는 영덕군민 전체가 방폐장 반대운동에 동참했지만 2년 만에 찬성 쪽으로 내몰린 것이다.
방폐장 유치 주민투표에서 경주가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방폐장 홍역도 일단락됐지만, 이때부터 지역 내 찬반 간 골이 패기 시작했다.
방폐장 반대의 중심에 섰던 시민단체인 영근회(盈根會) 회원이었던 A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2003년과 2005년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2003년에는 당시 김우연 군수의 입장이 반대였기 때문에 공무원들과 유지들이 묵인하거나 반대운동에 대한 지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5년의 경우, 당시 김병목 군수가 방폐장 지원금으로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며 유치운동을 하고 나서니 공무원들의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유지들과 주민들의 지원도 줄어들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많이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세 차례의 방폐장 반대운동 이후 주민들의 피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대운동의 선봉에 서서 방폐장 건설을 무산시킨 일부 사람들은 시위로 인해 재판정에 서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식당을 운영하던 주민 몇몇은 불매운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난 2010년 영덕군은 원자력발전소 유치를 신청했다. 하지만 원전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와 설득은 이뤄지지 못한 채 결국 2012년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석리'노물리 일대 324만㎡가 원전예정구역으로 지정됐다.
주민들은 "원전문제를 놓고 지역 갈등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 있는 여론수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영덕 김대호 기자 dh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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